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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불꽃 (마타요시 나오키) - 고군분투하는 개그맨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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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불꽃 (마타요시 나오키) - 고군분투하는 개그맨 이야기

Zen.dlt 2016. 8. 31. 23:16



급변하는 정세나 문화에 발맞춰 다양한 장르와 소설가들이 출현했던 시대, 아쿠타가와는 시적 정신을 추구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그 자신이 시대의 격변에 좌절하여 자살해버리고 고전 소설이 종료했음을 알리는 시대적 아이콘이 되었다. 아쿠타가와 상은 아쿠타가와의 실험적이고도 순수했던 정신을 모티브로 했는지, 문학성과 실험성이 높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고 한다. 아쿠타가와의 말년작들은 난해하였지만, 다행히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들이 반드시 난해해야만 '실험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마타요시의 작품 《불꽃HIBANA》는 서정적이고 담백하다. '실험성'을 찾는다면, 아마 개그콤비가 선보이는 '만자이'의 말장난을 글 속에 껴 넣은 것 정도일까. 실험성보다는 대중성이 훨씬 강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개그맨 도쿠나가는 아타미의 불꽃축제에서 개그맨 콤비 '스파크스'로 무대에 올랐지만 관객 동원에 실패해 무대는 한심하게 종료된다. 뒷 무대를 담당한 '천치들'의 멤버인 가미야의 당찬 모습에 끌린 도쿠나가는 겨우 네 살 연상인 그를 '가미야 씨'라고 부르며 사제 관계를 맺는다. 이후  스파크스, 천치들은 도쿄에 상경해 개그맨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배려심 있는 도쿠나가는 개그에 대한 철학이 남다른 가미야를 존경하고, '천치' 같으면서도 순수한 가미야의 모습을 좋아한다. 가미야는 빚에 허덕이고, 여자친구 집에 얹혀 살지만 '사부'로서의 체면은 지키고 싶은지 도쿠나가에게만은 다정하고도 엄하다. 어느덧 10년이 흘러간 동안 도쿠나가의 인지도는 점차 높아졌지만 단번에 '대스타'가 되는 후배 개그맨을 보며 현실의 냉혹함을 깨달을 뿐이다. 십 년간 의지해왔던 가미야가 자기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내심 답답했던 걸까, 도쿠나가와 가미야 사이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전보다는 관객의 웃음소리를 많이 듣게 됐으니까 가미야 씨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일상의 덜 떨어진 나는 그토록 가미야 씨를 웃길 수 있었는데도 무대에 선 나에 대해 가미야 씨는 웃어주지 않았다. - 160 페이지

나는 재미있는 희극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희극인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도 재미있어야 한다. - 161 페이지 

가미야 씨가 상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었다. 언젠가 세상을 자기 쪽으로 돌려세울 수도 있는 무언가였다. 그 세계는 고독할지도 모르지만 그 적막은 스스로를 고무해주기도 하리라. 나는 결국 세상이라는 것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참된 지옥이란 고독 속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었다. 가미야 씨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 눈에 세상이 비치는 한,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다. 나 자신의 이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또한 세상의 관념과도 싸워야 한다. 가미야 씨는 길 같은 건 벗어나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앞을 걸어가는 가미야 씨가 나아가는 길이야말로 내가 벗어나야 할 길인 것이라고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 163 페이지

"가미야 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아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개그맨들이 각자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게 있다고요. 하지만 그걸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잖습니까. 그런 쪽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냥 없었던 것이 되어버리잖아요." -164 페이지 


'웃프다!' 라는 광고 문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은 묘한 감각을 갖고 있다. 주인공들은 화나고 슬프고 답답할 때도 만담이나 바보 짓을 하면서 상황을 우습게 묘사한다. '무겁지 않은' 소설인데,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도 않다. 

마타요시는 도쿠나가의 담담한 문체를 통해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 고민하는 무력한 모습을 전달한다. 도쿠나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개그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유명세를 타지 못해도 무언가를 원망하는 일이 없다. 적은 관객수에도 기뻐하고 악플 속에도 선플이 있음을 감사하며, 자신의 개그에 진심으로 웃어주는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 도쿠나가를 보고 있으면 따스한 인정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도쿠나가가 꽤 진지하기 때문에 소설 전반에서 웃음을 담당하는 것은 가미야이다.  도쿠나가가 묘사하는 '가미야 씨'는 언제나 호탕하게 소리치거나, 개똥 철학을 번지르르하게 이야기하고, 도쿠나가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더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만다. 꾸역꾸역 도쿠나가의 '사부'로 있고 싶어 하는 가미야의 프라이드 자체가 왜인지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도쿠나가가 자신의 개그에 웃어주지 않는 가미야에게 틀어져 심한 소릴 하고 말았을 때,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가미야의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충격적인 결말을 향해 간다. 늘 볼멘소리하면서도 가미야를 존경하고 따랐던 도쿠나가조차 큰소리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다. 나는 왠지 인물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사건인 것 같으면서도 개연성이 깨져버린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처음부터 꿈꾸듯이 비일상적인 가미야의 언동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거라고 봐야하는 걸까 하는 의아한 기분. '개그 + 소설이라면 뭐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냉혹해질 뻔하기도 했지만, 결말과 연결되어 더욱 익살스러운 인상을 주었으니 '웃긴다'라고 하는 점에서는 목적 달성인 것 같다. 결말에서 가미야는 소년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개그에 대한 애정을 불태운다. 왠지 그런 모습을 보며 "못 말린다니까" 하면서 어딘가 곤란한 듯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다행이야. 열정이나 도전 같은 것들에 대해 좋은 여운을 남기고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