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리뷰] 모든 것이 F가 된다(모리 히로시) - 이공계 스타일 추리와 독특한 애정라인 본문
모리 히로시 작품들이 개정되어서 새 번역, 새 디자인으로 속속 출간되고 있다. 2015년, 《모든것이 F가 된다》가 애니화되면서 그 여세를 몰아 책까지 새로 나오는 듯 하다. 이전에 모리 히로시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기세 좋게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면 한 번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고로, "애니화" 되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는 법.
이야기는 모에가 부친과 친분이 있었다는 마가타 시키 박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가타 여사는 프로그래밍 분야의 천재로,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지만 15살 때 양친을 살해한 일로 어느 섬의 연구소 방에 갇혀 지내고 있다. 이후 사이카와 교수와 모에, 사이카와의 대학원생 제자들은 마가타 여사가 있는 섬으로 세미나(여행)를 떠나는데. 사이카와와 모에 둘이서 연구소 방문한 때에 연구소에서 마가타 여사의 시체가 나타난다. 절대로 안에서는 열 수 없는 마가타 여사 방의 문이 열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죽은 마가타의 시체가 로봇에 실려 나온다. 방 안에는 범죄자인 여사만이 살고 있었고, 누구도 침입한 흔적이 없다. 때마침 마가타 시키의 동생, 미키를 연구소로 데려온 소장 또한 옥상의 헬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이카와는 연구소 내부에 숨겨진 증거들을 모아 진범 찾기에 나선다.
《모든 것이 F가 된다》라는 제목은, 연구소 내 컴퓨터에 마가타 시키가 써 놓은 메세지에 등장하는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시체. 밀실. 메세지. 이런 것들이 '추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소설 속의 단서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VR(가상현실)까지 등장하는데, 1994년도에 일어난 사건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진보된 지식을 사용해 추리 소설을 써낸 것에 감탄하게 된다. 애초에 사이카와 제자의 논문 주제가 '가상현실이 미래 건축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사건과 추리를 넘어서서, 학문적인 요소들도 엿보게 되는 건 역시 저자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생기는 묘미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대학 시스템과 교수로서의 입장을 그리고 있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겉모습은 수염 텁수룩하고 '교수'와는 동떨어진 이미지의 사이카와는 분명히 매력적인 존재였다. 지나치게 천재적이어서 오히려 거짓성이 느껴지는 모에나 마가타 여사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이카와가 직접 범인 색출에 나서는 계기가 가장 인상적이다. 대학교수가 되고나서 외부 세력의 압력에 치이고 연구자로서의 순수한 열정만을 믿을 수 없게 된 그. 살인사건의 관계자가 된 순간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묵인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자유로운 방랑자'로서의 욕구가 치밀어오른다. 결국 본인이 범인을 찾겠다고 마음 먹는 데는 사이카와가 평소 마가타 여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리 히로시는 이후 S&M 시리즈에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탄탄히 개척해 나간다고 하는데, 사이카와는 분명 '탐정사전'에 이름을 올릴만한 캐릭터가 되겠구나 생각하게 했다.
S&M에서 셜록과 왓슨의 관계가 보인다. 교수인 사이카와는 어른의 시선에서 멀리 내다보고 모에를 깨우친다. 모에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사이카와에게 영감을 준다. 단 사이카와와 모에의 러브라인이 간간히 묘사될 때마다 왜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처음엔 사제간의 러브라인이 내게 도덕적인 부담감을 안기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천진하게 웃으며 사이카와에게 호감을 드러내다가도 저 혼자 사이카와에게 삐져 눈물 짜는 모에의 하는 짓이 한심했던 거였다. 모에의 열렬한 구애에 둔감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애매한 태도를 고수하는 사이카와에게도 꽤나 짜증난다. 나는 이런 '정해지지 않은 애매한 관계성'이란 걸 정말 싫어해서. 아마 이 상태가 이후 시리즈에서도 계속되는 거라면 정말 답답해서 머리털 쥐어짜게 되지 않을까.
구시대적인 트릭과 결여된 스토리성에 지쳐 본격 추리소설이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S&M 시리즈는 그런 부분들을 만족시켜줄 좋은 작품이었다. 그 '독특한 세계관'이란 게 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 다음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본문 중>
「"모르겠어.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렇다고 이런 때 마지막 카드를 내놓기에는 속이 쓰리고......"
"뭐죠? 마지막 카드라는 게?"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지."」 - 164 p
「"어라? 너도 초등학생 땐 항상 인형 같은 옷을 입고 다녔잖아."
"교수님!" 모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런 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실례예요!"
"뭐가?" 사이카와는 놀랐다. 왜 모에가 부루퉁해졌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기분이 상한 건데?"
모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이카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171
「나는 어떠한가, 사이카와는 생각했다. 대학이라는 자유롭고 비생산적인 환경에 몸을 담은 지 벌써 십 수년이 지났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중략)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략) 싫은 것이야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중략) 20대 때는 무턱대고 공부를 했다. 연구에만 시간을 쏟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만의 문제에 흥분하고, 혼자서 느끼는 그 정복감이 최고의 것인 줄 알았다. 순수한 학문은 끝이 없다. 도달의 기쁨을 맛볼 길 없는 허무함이야말로 귀중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사이카와는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자유로운 방랑자가 아니었다. 언어는 제한되고 행동도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게 다 살기 위한 일이다, 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 206 p
「"추억은 전부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은 전부 추억할 수 없다는 거야."」 - 258 p
「자신의 무관심함에자기도 경악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분석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무언가에 대한 방어를 위해 형성된 메소드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 그는 겁이 많아서 항상 무서워 떨었다고 한다. 몇 겁이나 겹쳐 놓은 충격 완화 장치로서, 그는 두껍고 표정 없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흥미미있는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무언가를 피하고 있었다. 연구에만 몰두해 온 것도 틀림없이 무언가를가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 - 351 p
「사이카와 교수, 당신은 머리 회전은 늦지만 지향성은 탁월해요. 판단력이 약하지만 객관성은 발군이에요. 아직 당신 안에는 몇 사람인가 들어 있지요? 여러 사이카와 교수가 있을 거에요. 당신 머리 회전이 느린 까닭은 그 인격들간의 세력이 균등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 독립성이 뛰어난 객관성을 만들어 내고 있지요. 균등한 세력이 예민한 지향성을 낳는 거예요. 당신은 몇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기적적으로, 그것들이 섞여 있지 않아요. 아니, 진정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당신이 만들어낸 거죠......" 」 - 44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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