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리뷰] 야시 (쓰네카와 고타로) - 갈림길 위에서 마주한 저쪽 세상 본문
일본호러소설 대상은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1997년 수상) 이후로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다가 쓰네카와 고타로의 《야시》(2005년 수상)가 겨우 한 권 더 번역되었을 뿐이다. 해마다 심사해도 당선작이 없는 해가 많을 정도로 어려운 상이라고 하는 일본호러소설 대상. 얼마 되지도 않는 작품들, 왜 국내에 안 나와주는 걸까. 때문에 《야시》는 소중히 아끼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야시》에는 『바람의 도시』와 『야시』 두 개의 단편이 실려있고, 주인공은 각각이지만 두 이야기의 세계관은 연결되어 있다. 『바람의 도시』의 주인공 8살 소년은 우연히 '고도'라고 불리는 이공간으로의 통로를 알게 되고, 친구와 함께 고도에 들어간다. 두 소년은 고도에서 길을 잃지만 고도에서 만난 '렌'이라는 청년이 둘에게 '현실세계'로 빠져나가는 통로를 안내한다. 이 고도의 세계는 요괴와 죽은자들이 사는 곳으로, 고도에서 나고 죽은 것은 절대 현실 세계로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마침 고도의 길에서 마주친 렌의 지인이 기습 공격을 해오고 그 바람에 주인공의 친구 가즈키가 치명상을 입고 만다.
야시夜市 는 밤 시장을 뜻한다. 여러 세계가 연결되어 있고 악마와의 거래가 행해지는 환상적인 공간인 야시. 야시를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야시가 열리는 푸른 등이 빛나는 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 주인공 유지는 친구 야시를 소개시킨다며 이즈미를 데리고 바닷가 숲 속으로 들어간다. 조용하고 차가운 색채의 야시 안에서 둘은 '무엇이든지 벨 수 있는 칼'을 산 노신사와 동행하게 되는데. 이윽고 유지는 이즈미에게 어릴 적 야시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이야기해준다. 유지는 5살 무렵 동생과 야시에 들어갔다가, 납치업자에게 '야구를 잘하게 되는 능력'을 사고 동생을 팔았다. 우는 동생을 다시 돌아오겠다고 달래면서. 한번 야시에 들어가면 무언가를 사야만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 이제 유지는 납치업자를 찾아가 다시 한 번 거래를 요청하고자 한다.
야시는 일본 특유의 문화를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이다. 발 한 번 잘못 들이면 마주하게 되는 색다른 세계. 분명 알고 있는 공간 위에 세워져 있지만 알던 곳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 적용되고 죽음 조차도 넘어선 환상적인 세계가 '고도'와 '야시'로서 그려지고 있다. 《야시》 속 두 이야기는 이공간 속에 빠진 평범한 인간이 자기 세계로 돌아오려 하는 처절한 사투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무섭다. 서슬 퍼런 장면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끝없이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 존재 조차 위태로워진다고 하는 설정이 호러스러운 것이다. 환상적 세계에서의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경험을 담은 책 중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도 다소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저 세계'의 법칙을 간략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게 묘미인 작품들이다.
나는 유독 생과 삶의 이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의 도시』에서 물소수레에 시체를 싣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목적지를 향해 청년과 소년이 걷는 신기한 장면 안에서 소년이 던지는 질문에 깊이 담겨있다. "한 여름에 시체를 싣고 소걸음의 속도로, 풍문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간다.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75 p) 또 작중 승려로 보이는 사람 또한 부활의 의미에 대해 "어떤 기적을 만나든 간에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 시작부터 끝까지 각오와 희생이 필요하지요." (119 p)라고 말하며, 삶이 간단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소중히 해야한단 걸 새삼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린이 목숨을 파는 악마가 "이 친구 보게. 인간을, 어린아이를 칠십이만 엔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나?" (176 p) 하고 황당해하는 장면도 왠지 대단히 느껴질 정도.
《야시》는 긴급한 장면 전환을 통해 허를 찌르고 이야기를 뒤집고 있어 극찬하고 싶다. 잔잔하고 고요하면서도 깊은 메세지가 느껴지고. 짧은 분량임에도 시각적인 효과와 상상력이 밀도 있게 채워져있다. 사람은 환상적 경험을 안고서 현실로 돌아와 또다시 미지의 "현실"을 살아간다. 이즈미 교카 문학도 "눈 감은 순간에 생겨나는 이공간"에서 호러를 찾지 않았냐며, 『야시』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이름이 '이즈미'였던 것에서 괜히 이즈미 교카의 환상세계와 비슷한 감각을 《야시》에서도 읽고 있다. 계속 more more 하고 외치게 되는 장르이건만, 소수의 작품 밖에 만날 수 없는 게 아쉽다.
「어느 쪽으로 가든 잠시만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고 한다. 계속 걸으면 여기저기로 갈라지기를 거듭해서 미로처럼 온 일본으로 뻗어 있다고 한다. 개중에는 다른 길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산속의 숨겨진 마을로 통하는 길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로든 이어져 있다.」 - 40 p
「한 여름에 시체를 싣고 소걸음의 속도로, 풍문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간다.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 - 75 p
「"고도에서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고도의 것입니다. 고도에서 나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아요. 고도에서 태어난 자와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숙명을 타고난 자를 우리는 영구방랑자라 부릅니다."」 - 118 p
「"어떤 기적을 만나든 간에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 시작부터 끝까지 각오와 희생이 필요하지요."」 - 119 p
「"길은 교차하고 계속 갈라져나간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미아처럼 혼자 걷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끝없는 미로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 124 p
「"그건 곤란해. 이곳에서는 뭔가 사지 않으면 나갈 수 없어. 그런 주술이 작용하고 있다고."」 164 p
「"무엇보다 여기는 야시거든. 여러 세계가 공유하는 영역이야. 어느 세계로 끌려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 172 p
「"이 친구 보게. 인간을, 어린아이를 칠십이만 엔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나?"」 - 176 p
줄거리 정리 (결말 있음! 스포일러 주의)>
『바람의 도시』: 고도 속에서 렌과 소년들을 습격한 고모리라는 남자는 렌의 손에 죽지만, 소년 가즈키는 고모리의 총을 맞고 중태에 빠진다. 주인공 소년은 통로를 통해 원래 세계로 갈 수 있었지만 렌과 함께 가즈키를 '부활' 시킬 수 있는 곳으로 무작정 걸어가기로 한다. 걸어가면서 렌 청년이 왜 고도에 들어왔는지 '렌'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렌은 고도에 들어온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로, 고도의 것이기 때문에 고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어머니와 헤어져 호시카와라는 남자와 생활하던 렌. 렌은 자기 어머니가 사랑하던 연인의 뼈 단지를 고도로 가져와 부활의 비법을 이용해 자신을 잉태했단 걸 호시카와에게 듣는다. 곧, 자기 자신은 어머니의 옛 애인이었던 셈. 호시카와의 짐 속에서 살해당한 남학생의 기사를 읽은 일이 생긴다. 이후 고도와 현실을 오가며 살인과 범죄를 일삼는 고모리란 남자의 길을 안내해 주게 된 렌에게, 고모리는 자신이 살인한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말한다. 렌은 고모리가 자기 자신을 과거에 죽였던 남자란 걸 알아차리고 그를 죽이려 하지만(긴장감 최고조) 고모리는 도망간다. 이후 다시 만나게 된 때 결국 렌이 고모리를 살인하고 고모리는 좀비처럼 고도의 숲 속으로 사라진다. 렌과 소년은 부활의 비법을 아는 절 같은 곳에 도달 했지만 결국 부활시키기 위해선 대신 소년의 육신을 바쳐야 한단 말을 듣고 가즈키 되살리기를 포기한다. 주인공 소년은 렌과 훗날을 기약하고 고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간다.
『야시』: 유지는 이즈미와 노신사와 함께 야시를 뒤져 납치업자를 찾아낸다. 납치업자는 십 년전에 사들인 아이들 중 일부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유지의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야시에서 사기는 있을 수 없는 법이기에 유지는 납치업자를 믿고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이즈미로 하여금 동생을 사고 자신을 팔게 한다. 거래가 성사된 찰나 노신사가 칼로 납치업자의 목을 벤다. 노신사는 사실 자신이 유지의 동생이었으며, 납치업자에게 팔린 후 바로 도망쳐 어느 노파에게 '젊음'을 팔고 '자유'를 샀기에 자신이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돌다 야시에 두번째 들어왔을 때, 원래 세계에 돌아가기 위해선 거래를 무효화하거나 납치업자를 죽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세번째 들어왔을 때 유지는 형을 만나 정체를 숨기고 그를 시험했고, 사기를 쳤다는 구실을 이용해 납치업자를 죽였지만, 이미 거래가 성사된 후라 유지 본인은 야시에 남아 돌아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야시가 사라지고 현실 세계에 남은 건 이즈미와 노신사, 형이 쥐어준 두툼한 지갑 뿐이다. 보통의 인간은 세 번만 야시에 출입할 수 있다. 이미 기회를 다 쓴 노신사가 이즈미에게 언젠가 당신이 야시에 가면 유지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하고 길을 떠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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