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서평] 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쓰히코) - 유령같은 너 때문에 짜증이 나 본문
제목만 봐서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엿보는 고헤이지》. 《웃는 이에몬》에 이어 한 참 지나 이제야 읽는 때가 왔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연기가 아니라 아예 평소 모습조차도 유령같은 배우 '고헤이지'의 이야기로. 고헤이지가 고액의 역할을 제안받아 극단과 함께 떠났다가 그곳에서 참변을 당한 후에, 유령으로 나타나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다. 고헤이지의 유령같은 면모는 아내 오쓰카는 물론, 친구 다쿠로, 그리고 미남 간판 배우 가센으로 하여금 정체모를 짜증을 유발시키고. 여기에 도적 운페이, 거짓말쟁이 지헤이 등이 엮이면서 피 튀기는 잔상을 일으키고 만다.
"교고쿠 나쓰히코가 그리는 인연과 관계의 이야기" 라는 수식어가 결코 틀리지 않은 듯. 등장인물들이 군더더기 없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밀도 있는 짜임새를 나는 좋아한다. 인물 모두가 과거에 인연이 있었고 그것이 수면 위에 올라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 형식이다. 또 이야기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께끼들이 다음 장에서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해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이지만 '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독백을 하는 인물과 장면이 계속해서 변하고 대사와 무대요소들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과 가장 다른 특이점은 인물의 감정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거의 삼 분의 이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 분명 이 작품을 진짜 '극'으로 올린다고 한다면 많은 각색이 이뤄져야 할 것 같다. 심리 묘사는 《백귀야행 음》이나 《백귀야행 양》에서 사용된교고쿠 특유의 묘사법이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아무개는 ~~한다." "그러나 ~~ 해봤자 ~~할 뿐이다." "그래서 아무개는~~한다." 정형화된 이 삼단논법(?)에 질리기도 할 법하지만, 그 모든 독백과 같은 심리묘사들이 없었다면 이만큰 전율을 주는 이야기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해버린다. 대사와 상황 설명만으로는 멋진 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면 가장 이입이 어려운 인물은 유령 고헤이지였다. 처음 등장할 때 부터 헛방 장지문 뒤에 앉아 뒤꿈치나 만지작 거리면서 존재 자체가 엷어지고 싶어하는 이 옅은 남자의 심리는, 글로 설명해도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오히려 후반부에 고헤이지가 지헤이에게 과거사를 토로하는 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그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고헤이지가 다쿠로의 칼에 찔리고도 지헤이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 후 지헤이에게 진심으로 "오쓰카를 좋아한다" 고 고백하는 장면이나, 집을 습격한 다쿠로 앞에 진짜로 '부활해' 서서는 오쓰카를 지키는 장면 등에서 그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컨대 고헤이지도 오쓰카도 '요령'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저런 답답한 사람은 밖에 나와 있어도 눈에 보이는 만큼 부아만 치민다는 뜻이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도 않고, 무엇을 해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멀거니 앉아 있기만 하니까."」 - 19 p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수씨,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기 있는 고헤이지는 유령 연기만은 일품이라오. 괴담 연극에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란 말이지요. 이 연기만은 당해낼 수 없다고, 녀석의 스승인 선대 마쓰스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이다."」 21 p
「다쿠로는 그날을 위해 고헤이지와 사귀고 있는 셈이다. 붙임성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으며, 장점도 없고 돈도 없는 고헤이지 같은 사내와 사귀어도 동전 한 닢만큼의 이득도 없다. 재미도 없고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재미가 없어진다. 불쾌해진다.」 - 57 p
「비겁하다. 고작해야 유랑 배우,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닐 텐데. 성인군자인 척한다고 해서 모양새가 나는 신분도 아닐 텐데. 성을 좀 내 보면 어떠냐, 울면 어떠냐. 자신의 잘못은 안중에도 없이 네가 나쁘다, 네가 밉다고 고함치고 소리치고, 그래야 비로소 남녀는 부부가 되는 것이라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78 p
「"잘 들어라, 잘 들어, 잘 들어, 도로쿠. 네 사특한 마음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분수를 알아야지. 오아키 같은 처녀는 설령 천지가 뒤바뀐다고 해도 너 같은 천치를 좋아하게 되지 않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평생 너를 싫어하고, 경멸하고, 사갈 같은 취급이나 하는 것이 고작일 게다. 그렇다면 하룻밤이라도 마음을 이루고-."
죽여 버리려무나.」 - 138 p
「이번 일은 전부, 아니, 이 공연 자체가 그 범인인지 뭔지를 빠뜨리기 위한 덫이다. 다쿠로이ㅡ 생각에 의뢰를 한 것은 스가야이리라. 그림을 그린 것은 도쿠지로가 말한 사기꾼이다. 고헤이지는, 아니, 이 다마가와 극단 자체가 장기말이었던 셈이다. 자세히는 모를 테지만 어디선가 그것을 감지하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다테오야마는 영문도 잘 모른 채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리라. 분하다. 다쿠로는 그런 잔재주를 몹시 싫어한다.」 - 174 p
「그때 처음으로 가센은 다쿠로가 고헤이지를 때린 이유를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가센이 품은 살의의 정체다. 가센은 그때, 무슨 말을 해도 여전히 공허한 얼뜨기의 눈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는 형평없는 유타를, 어찌 된 셈인지 격렬하게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질투보다 훨씬 거무죽죽한 감정이었다. 공포-였을까.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격을 하는 작은 짐승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아니. 고헤이지에게 아버지를 겹쳐 보고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 300 p
「또 누구 하나 가센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극단의 다테오야마가 고용된 유령 유타를 질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것도 그 시체를 환시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 306 p
「다시 죽임을 당하기라도 하지 않는 한 고헤이지는 살아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사카 늪에서 사라졌을 고헤이지의 목숨은-지헤이가 구했으니까.」 - 355 p
「말하자면 지나가던 이에 불과한 지헤이가 왜 이렇게 진지해진 것일까. 아마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리라. 겨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고헤이지가, 이대로 그냥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일을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 358 p
「"고헤이지가 유령이 되어 너에게 나오는 것은 질투를 해서가 아니라, 네가 죽였기 때문이 아니냐."」
- 395 p
「"내가 너를 유혹한 것은 이, 여기 있는, 내가 참으로 싫어하는."
오쓰카는 손을 뒤로 돌려 남은 모기장을 움켜쥐었다. 힘껏. 끌어내린다. 모기장이 떨어지고.
한 치 반의 틈이 나타났다. 소문이 자자한 형편없는 배우, 막을 열 수도 없는 서툰 연기의 연극-. 막은 연 것은-.
"너와 잔 것은 이-고헤이지에게 심술을 부리기 위해서다."」 - 39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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