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리뷰] 여신기 (기리노 나쓰오) - 남녀의 숙명은 신들이 만들었다더라 본문
우리나라 단군신화 처럼, 일본에 전해내려오는 신화를 적은 《고시키》. 기리노 나쓰오의 《여신기》는 그 신화 안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소설인 것 같다. 이자나미와 이자나키 부부신의 사랑과 이별의 모습에서 인간의 연애 모습을 똑같이 엿볼 수 있는 소설이었는데. 무슨 우연인 건지, 《K.N의 비극》에서 논해졌던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출산의 부담'이라는 소재가 《여신기》에서도 가장 큰 인상을 주었다.
이자나미가 말한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낮과 밤, 빛과 어둠, 양과 음 등으로 말이다. 왜 둘로 나뉘었느냐 하면, 하나로는 부족하며 둘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 또하나, 만사는 대극이 있기에 더 돋보이며, 서로가 있음으로써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138 p) 그랬건만 자신은 불의 신을 낳다가 죽어 황천국에서 썩은 모습이 되고, 남편인 이자나키는 이자나미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곤 절연을 선언한다. 그러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전국을 돌며 수많은 아내를 맞이하고 자식을 낳는다. 이자나미는 이에 분노해서 하루에 천 명씩, 그 아내들의 목숨을 황천국으로 뺏어온다. 이자나키가 인간이 된 후 이자나미에게 사과를 하는데도 여신 이자나미는 용서하지 않고 황천국 여신의 임무를 계속한다. 신하 나미마가 이자나미에게 이자나미 님의 괴로움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이자나미가 대답한다. "여신이라는 사실이다." (307 p) 나미마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끌어안고 있는 것 조차 괴로워 잊고 싶어하는데, 이자나미는 여신인지라 그 배신감을 잊지 않고 여자로서 생명을 계속 죽여야하는 신의 입장이 괴롭다고 한다. "(원한이)사라질 리가 있느냐. 삶의 즐거움을 구가하던 자가 황천국으로 쫓겨난 자의 심정을 알 리 없지. 앞으로도 원망하고 증오하며 죽여갈 것이야." (323 p) 증오와 복수심의 불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은, 이자나미를 닮았다.
무녀 집안의 나미마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 당해 낳은 딸과 헤어지고 황천국에 와 이자나미를 받들게 된 것. 이자나미가 이자나키와 있었던 일을 혼령 나미마에게 이야기 하는 부분. 나미마가 벌이 되어 인간 세계에 돌아가 배신자 남편을 죽이고 황천국으로 돌아온 일. 불로의 인간인 야키나히코가 된 이자나키가 곳곳을 돌며 미녀들을 아내로 삼다가 생명을 포기하고 이자나미에게 도달하는 부분. 이자나키가 인간으로서 죽고 난 후에도 황천국의 일을 지속하는 야속한 운명의 이자나미와 나미마. 신화와 무녀 신앙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출산과 죽음, 애정에 대해 여러 인물이 보여주는 감정라인. 이야기로서 흥미진진한 건 말할 것도 없었지만. 아무튼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출산의 부담을 홀로 지어야 하는 여성의 고통'을 가진 이자나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사회과학이 이를 해석하려들기 이전에 이미 일본의 선조도 이런 이치를 알고 있었고, 신화로까지 만들면서 서러운 속을 달래야 했는가보다. 《K.N의 비극》 다음 《여신기》를 순서대로 읽게 된 건, 감정라인을 연결시키고 읽는 가장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
「"나와 이자나키는 부부가 되어 관계하며 죽도록 나라를 낳았다. 같은 일을 했는데 어째서 이자나ㅣ는 아무상관 없다는 듯 혼자 양지에서 사는 것이냐."
"이자나미 님은 출산중에 돌아가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요. 이자나키 님은 남자이니 목숨에 지장이 없으셨던 겁니다. 그 차이로 두 분의 운명이 갈린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이자나키는 남자인데도 황천국에서 돌아간 뒤 신들을 잔뜩 낳지 않았더냐. 아마테라스라는 태양의 여신을 낳고 최고신이 태어났다며 기뻐했다고. 여자인 내가 낳은 아이는 최고신에 어룰리지 않아서 나를 부정한 존재로 치부해 황천국에 가둬놓은 거냐? 그토록 사랑하던 남자와 이렇게 헤어져 죽음의 세계에 살게 되다니. 이자나키는 줄줄이 새 아내를 맞으며 새로운 생명을 낳고 있지 않느냐. 나미마, 아느냐? 나는 여신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 144 p
「이자나키가 "이자나미, 내가 잘못했소. 당신이 출산으로 생명을 잃었는데도 배려심 없이 내 슬픔만 생각했구려.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이었소. 그래서 신이기를 포기했지. 나는 이제 신이 아니니 더이상 아내를 죽이지 마시오. 아니, 아내뿐 아니라 천 명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접어주시오."」 - 313 p
「"신은 우리의 욕망과 부정을 모두 떠맡고 과거까지 짊어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이자나미 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올렸습니다."」 - 324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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