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도서/리뷰]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 건축가와 마조히즘 본문
<우리는 사랑일까(원제: The romantic movement)>
1년 전에 완독을 하고서 1년 만에 다시 읽는 <우리는 사랑일까>. 이전과 달리 책의 가치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의 성향에 대채 고찰하여 리뷰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몇가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다른 장르 문학의 사례를 들고 오기도 한다.
각자는 관계 속에서 상대의 무자비한 무신경함에 대해 본능적 짜증이 울컥 치솟았을 때 그것을 성격의 차이라고 판단할 것인지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것인지에 대한 매우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칫 상대에게 '당신은 성격이 유별나다' 하는 헛소리 역공을 할 여건을 제공하여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The romantic movement>의 여주인공 앨리스에게 특정한 시간을 제시하며 그 즈음 연락하겠노라고 한 에릭이 약속을 어겨놓고 결국 몇시간 후 앨리스가 직접 전화하게 만든 장면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에릭은 심지어 '나는 우리가 저녁을 함께 먹을 수도 있다고 한 것이지 반드시 그러하리라고 한 것은 아니자 않느냐' 하고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는가.
상대의 인격의 성숙도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쿨해지지 못하는 것을 자책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쉬울 것 없이 돌아서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아직 다행이나, 앨리스에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다. 그녀에게 에릭과 같은 남자는 미지의 영역이고,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연애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에릭의 무신경한 태도가 잦아지자 앨리스는 점차 견딜 수 없게 돼 결국 에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앨리스의 관계에 대한 의식 수준은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게 다 뭔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을 물을 수준이 되지 않았을테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질문이 그녀 안에 솟아오른 것은 앨리스 스스로가 에릭의 무관심에 의해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이 거창한 질문으로 연결된 것 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솟아오른' 질문에 대해, 단순히 '에릭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매몰차게 현실 직시하라고 윽박지를 일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 문제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가장 완곡한 표현은 두 가지로, 첫째, 에릭의 사랑을 대하는 자세는 (앨리스와 비슷한)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 에릭의 인품이 그저 자기 오만과 이기성에 젖어있어 사랑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에릭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앨리스의 취향과 취미, 생각들을 무참히 짓눌러 버리고 인격을 깔아내릴 때 마다 앨리스가 느끼는 것은 자신이 하찮은 인간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뒤에서 앨리스가 이러한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기전에 대해 분석가적인 입장을 취하며 적어내려갈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은나를 항상 대단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준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이 가진 사랑에 대해 정당화하였는가. 알랭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이 흥미로운 인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에릭과 같이 앉아 저녁을 먹을 때면, 적당한 상대만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리라는 자신감을 잃고,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어할 수 있는 것까지 타인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평가절하할 자격을 갖지 않는다. 그 믿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사실은 힘들다. 그러나 단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를 벗어나 도덕적인 규범들로 연결되면 그것의 정당성을 차치하더라도 필연적인 판단의 잣대가 생긴다. 매번 앨리스의 이야기를 묵살하고 별난 사람 취급하는 에릭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인품의 모남을 탓하는 것이 과연 터무니 없는 일인가. 독자 각각이 갖고 있는 인생의 어느 시절에 느꼈을 분노는 어떤 이에겐 에릭을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고, 그의 도덕성을 깎을 증거를 찾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수준의 문제로서 에릭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상대가 낚시를 즐기는 인간이라면 아무 수확 없이 인생의 시간만 낭비 하는 인간이라고 평가절하할 자격이 타인에게 있을 수 있는가? 낚시에 대한 취향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를 일으키는 영역에 들어있지 않음에도? 그렇다면 앨리스의 풍부한 감수성과 공상능력이 에릭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종류의 것일지라도 에릭에게 그것을 평가절하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요컨대 상대에 대한 간절함과 별개로. 이러한 질문 과정에서 오는 심리적 불편함에 노련해진 인간이라면 이것은 '다름'에 의해 오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보다 빠르게 이해한다. 그러곤 상대는 이 화제를 즐기지 않는군 하고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에 올리는 일이 없게 한다.
그러나 상대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단계를 지나 결국 모든 뚜껑을 열고 났을 때 두 사람에게 도무지 공통점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미 두 사람이 덜컥 환상 속에 젖어 결혼이라도 해버렸다면 어떠한가. 그러곤 두 사람이 실제로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요소와 시간들이 두 사람의 생활 속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맞이한다면 말이다. 그때에 어떤 '노력'을 만들어야 하는가. 결국 어느 쪽이 다른 쪽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되지 않는가. 야구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드라마 채널을 포기하고 같은 소파에 앉아 야구채널을 보아야 하는 아내의 경우와 같이. 이 시점에 '매력있는 여자의 조건'을 다룬 몇몇 책에서 읽은 흔한 레퍼토리가 생각난다. 여자에게는 까도까도 무언가 새로운 게 나온다는 감상을 남길 정도로 많은 매력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화장하고 쇼핑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교양과 지성이 있어 정치, 문화, 경제에 대해 논할 줄 알아야 하고, 너그럽기도 해야 하며, 사회와 어른에 대한 이타심마저 갖고 있으며, 최신 유행을 따라야 하고, 운동까지 잘 해야 한다는 수많은 조건들.
그런데 앨리스가 점차 에릭이 '매우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상에서 깨어나오는 과정이 그려진 것을 보며 질문을 갖는다. 그 많은 '여자의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과 토크들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매력은 왜 갖추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책들이 어필하고 있는 것들은 여자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조건인가? 바꿔 말하면. 까도 까도 계속해서 매력이 나와야 하는 것은 그저 '매력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매력있는 여자의 조건'이 여성독자를 대상으로 제목에서 어필 하려 한 책들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애초에 남녀에 대한 성 구별이 책 기반에 좀 더 깊이 깔려있는 것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맞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글을 써낸 남성 작가들은 여성편력가로서 비판을 받을 각오를 마땅히 해야 하는데, 여성작가도 이러한 상황에서 배제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대 여성이 갖출 수 있는 '매력적 요소'들이 왜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전히 해석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비판 말이다. 전근대적인 이 대전제에 근거해 현대 여성을 여전히 획일화 시키려 하는 시도에 비판을 가하는 것은 사실 진보적인 여성들일 것이다.
왜 알랭의 책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젠더 구별의 관념이 다른 많은 책들에선 여전히 느껴지는 것인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여성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는 것에 대한 예찬이 아닌, '요즘 시대엔 이래야 매력적인 여자가 된다' 라는 식으로 또 다시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자아상'에 가둬두도록 하는가. 실은 사회의 아름다운 발전은-진정 여성을 위한 것-더 넓은 곳으로 나가 즐기고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왜 행복의 가능성이 '매력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 되는가. 이러한 사회는 동일한 압력을 조금은 다른 형태로 남성들에게도 지워주는 사회이다. 그간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요리의 영역에 남성이 들어와 요섹남 트렌드를 만들어내자 요즘 남자는 요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재인식이 생겼다. 가부장제에 젖은 남성은 환멸에 찬 비난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듣는 입장이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아직도 남성들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자칫 로맨틱해 보이는 무언가의 특성을 부여한다.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혼신을 다해 요리하여 대접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로맨틱한 요섹남'이라는 타이틀을 쥐어준다. 여성이 낚시를 할 줄 알면 갑자기 남성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쿨한 여자가 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범인(凡人)의 수준이든 전문가의 수준이든, 각자가 향유하는 것들에 사실 '매력'과 '환상적인 요소'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단지 우리가 미치기 시작하면 그것들을 아름답고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로 착각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환상들이 이미 대중 속에 퍼져 나가 있기 때문에 '매력의 조건'들로서 굳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일시적으로(가끔은 억지로) 구축해 나간 관계가 열정과 광기를 잃는 시기를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그 '보잘것 없는 하나의 구성 요소'를 즐기는 상대에 대해 수긍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적 질문이 남는다. '상대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이 좋다'라는 말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란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러한 것을 -특히나 시간에 쫓기는 관계라면- 빠르게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겠다.
에릭이 '환상의 남자'가 아닌 평범한 남자, 더이상 환상과 유혹을 일으키지 않는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장면들을 앨리스가 그토록 자기를 혹사하면서까지 견뎌냈던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들의 세계의 바깥에서 보면 이 에릭도 앨리스도 하나의 개체일 뿐 서로에게 환상을 품게 할 신적인 존재가 아닌 것은 자명한데도, 앨리스에게 에릭이 그토록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사람으로 비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을 바깥의 시선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콩깍지가 씌인 것이고', '환상을 꾸는 시기이며', 언젠간 깨어질 '허니문'의 시간인데, 앨리스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비로소 다른 시선으로 관계의 형태를 지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객관적인 시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는 '결과'를 알아버리면 그에 대한 해석이 이미 '결과'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을 먹기 전에는 색과 냄새 등으로 와인소스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추측만 할 수 있지만, 맛을 보고 나면 더욱 더욱 더 확고히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알랭 드 보통이 <The romantic movement>에서 앨리스와 에릭을 이용해 관계에 대한 고찰을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심오하게 설명해야 하는 현상을 너무 심오하게 설명해버리면 그것이 대중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는 이치. 누군가는 '콩깍지가 벗겨지는 과정'에 대해 좀 더 심리학적이고 사회진화적인 측면을 탐구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것은 언어와 철학에 대한 탐미주의일수도 있고, 정신 없는 사랑의 회오리 속에서 솟아나는 광기를 설명할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수학에서 추구하듯, 가장 단순한 것으로 회귀하는 것이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쉬운 법이다. 그 심연에 무엇이 있든 우리는 '콩깍지'라든가 '허니문 시기의 종결'이라는 말로 쉽게 설명하는 방법을 이윽고 선택하게 되는지 모른다. 다음웹툰 <이토록 보통의>의 한 여주인공이 사랑을 주지 않는 남자에게 지친 관계 속에서 결국 이별을 고할 때 이렇게 말했다. "커피가 식듯 사랑이 식었어." 그 토록 모든 희생을 감수 하던 그녀가 하는 이 냉혹한 말은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실은 다각적 관찰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녀가 겪은 자학, 인내, 희생 등의 과정을 고려하면 그 한마디 속에 사실은 엄청 많은 것들이 들어있음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헤어짐'이라는 결정 자체에 대해 그녀가 '사랑이 식었다' 라는 말로 최종 선고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앨리스에게로 돌아가서, 멋대로 환상을 품어버린 앨리스에 대해 비난 까진 아니어도 자기 책임을 묻는 알랭의 태도는 타당해보인다. 에릭이 이별을 선고하는 앨리스에게 처음으로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기회를 달라, 어른답게 처신하자, 일을 다시 한 번 잘 풀리게 해보자'라고 제안한다. 앨리스는 '나는 지금까지 그 빌어먹을 기회를 당신에게 줄곧 줬었고 그때마다 당신은 그 기회를 짓밟았다'라고 말한다. 대화는 거기서 더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남겨진 에릭의 이야기도 더이상 조명되지 않았다, 그는 앨리스의 무대에서 퇴출되었다. 그런데 그가 만약, 무대 밖에서 '문제가 되는 게 있다면 평상시에 말해주었으면 되었을 것을 이런 갑작스런 일이 어디있는가, 이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분노한다고 생각해보자. 앨리스는 이것이 더이상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단지 에릭이 앨리스의 기준(혹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생각할 때, 그 동안 에릭의 태도에 앨리스가 상심하는 것 또는 억지로 태연한 척 하는 것들을 위기 신호로 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으로 인해 병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인식 이외에 자신은 계속해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도취하는 한편. 상대의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들이 관계에서 어느 정도 선을 긋는 자신에게 껄끄러운 압박감을 주는 것이, '비겁하지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 압박감을 비로소 기꺼이 감수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날것의 질문이 '당신을 떠날 것이다' 하는 최종 선고이다만 그것이 내려진 순간 보이는 반사적인 에릭의 반응이 결국 앨리스와의 더 진전된 관계를 절대 보장하지 않으리란 것을 독자는 상상한다. 앨리스가 바보같이 그것을 믿지 않기를 응원하기도 한다. 회의적 독자인 나는 생각한다. 결국 역경이 없었든 있었든 사랑과 감정에 대한 대단한 확신은 생기지 않을 인간에게는 영영 생기지 않을 일인지 모른다. 선천적으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과 낼 수 없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인간이 타고나는 가능성은 -적어도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는-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이상 커지지 않으리라는 설명을 더 믿는다. 이는 관계를 성공시킴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경험이 많아짐에 따라 성숙되어 간다고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즉 여러 만남을 통해-에릭도 여럿을 만나지 않았는가, 얇고 짧게-잔재주를 익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어디까지 참고 견디며 상대방을 납득, 수긍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러는 와중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자아를 잃지 않는 방법에 있어서 적절한 균형을 '이타적'이며 '합리적'으로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에릭과 같이 허영된 자존감에 싸여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리어 남을 상처내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힘든-영혼을 소모시키는 희생적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더이상 다른 이에게 희생하지 않겠다는 인식이 극히 강해진 나머지 그릇된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로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려 시도하기도 하는 것같다. 아무튼 그러한 미성숙함을 보이는 에릭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다. 알랭은 결국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권력이나 노력하여 서로를 밀고 당기는 정도가 20:20이면 좋겠으나 한쪽으로 치우져치게 된다고 말하였다. 앨리스와의 관계에선 항상 권력을 독식하던 에릭이 향후 다른 여자와의 만남에서는 -아마도 굉장히 마성적이며 앨리스와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졌을 누구- 권력을 상대에게 빼앗기는 입장이 된다고 가정하자. 그러한 상황에 과연 '에릭이 성장하였다' 라고 단언하며 눈을 씻고 상대를 바라볼 수 있을 일인가. 혹은 이 여성이야 말로 에릭을 성장시킬 대단한 뮤즈라고 경외감에 차 평가할 수 있는 일일까. 앨리스는 이 여성에게 '당신이 나보다 나은 게 뭔데?!'라고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평가/비교해 볼 때에 대개의 사람들이 사회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사회적 잣대만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을 거라는 점이다. 그 새로운 마성의 뮤즈의 직업은 무엇이고 수입은 얼마인지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다른 많은 요소들을 제치고 전면에 드리워진다.
사실 나는 에릭이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분석한다. 에릭이 만일 어떤 마성의 여자를 만나, 앨리스와 보여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에릭 자신의 주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의 일련일 거라 가정한다. 즉, 앨리스가 에릭과의 관계에서 혼란을 느끼며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했듯이 에릭에게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보다 더 먼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에릭은 결국 이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에게 책임감을 묻지 않는 여성들, 관계에 집착이 없는 여성들, 적절히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여성들과 적당한 만남만을 유지하리란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앨리스와 에릭의 성향을 책 바깥의 세상 속 사례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여기 앞으로 장거리 관계에 들어갈 예정인 연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성은 최근 새로운 직장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비행기 3시간 거리 만큼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여성은 연인이 떠나지 말라고 하면 스카웃을 재고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연인은 말한다. 장래에 좋은 기회인 만큼 자기 걱정은 하지 말고 이주하기를. 이 케이스를 떠올릴 때면 나는 상상하려 한다. 장거리가 될 목전에 '상대의 자유와 기회'를 존중하기만 하는 것은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 듯 하다. 상대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함에 있어서 자신의 커리어만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나는 신경쓰지마' 하는 것은 일종의 존중인 것 처럼 해석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이 경우를 <The romantic movement>의 에릭에 적용하면 다른 해석이 가능해지는데, 관계에 거부감을 갖고서 공격적으로 친밀성과 존중을 거부하는 에릭과 같은 사람은 오히려 이 장거리 관계 시작에 대한 위기감이 없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는 아마 관계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는 독립된 존재로 기능하고 싶다는 일종의 이기적 마음이 바탕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중의 반댓말은 거리감이다. 진정 상대를 나의 일부로 생각하는 관계에 있어서 약간의 집착과 욕심은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존중은 오히려 일생에서 한 번은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할 조금은 거리감 있는 선배, 친구, 직장 상사 등에게 생기는 것들이다. 동경이란 마음에는 그 사람을 이해할 능력과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 처럼, 존중이라는 말엔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빠져버려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떠나는 사람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남겨질 사람이 말하는 존중이란 허울 속에 드리워져있는 거리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차라리 장거리 관계는 그것이 예고된 시점에 관계를 끊어내야 할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만으로 관계를 역전시킬 만큼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가. 움직이지 않는 산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영원히 없다는 해석을 여기에 적용시킨다. 영원히 가능성이 없던 이에게 최후의 수단을 쥐어준다해도 이루어질 가능성은 비참하리만치 적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수많은 기회를 주며 관계를 개선해보려하고 자신의 정신을 유지하려 하던 앨리스를 생각할 때. 이 관계는 처음부터 '안 된다'는 선을 타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승부사가 해석하는 관점일런지 모른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서 무엇을 실행하기 이전에 그 목적 달성 가능성을 수치적으로 재어보고 뛰어드는 분석적 승부사 말이다. 이들은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앨리스와 같이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두 사람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단 것을 인정할 줄 안다. '존중'이라는 말이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인정할 줄 안다.
아까 앨리스와 에릭의 이야길 장거리 연애 관계에 적용시켰던 예로 돌아가서. 나는 대개의 연인들 중 이러한 '뜻밖의 사건'을 겪지 않고서 관계의 다음 단계, 즉 '결혼'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장거리 연애의 가능성은 인생에서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형태로서 두 사람의 관계에 도전을 해올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갑자기 둘 중 하나가 병에 걸린다든지, 바람을 피운다든지, 연애할 땐 몰랐던 파격적인 성향이 갑자기 드러난다든지, 직장에서 해고된다든지, 사업이 실패한다든지 기타 등등.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 이윽고 두 사람은 관계에 대해 재고하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흔히 "연인은 역경을 겪어 보아야 한다" 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다. 사랑에 확신이 찬 연인들은 대개 어떤 역경이 와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영원히 사랑할 것이기에' 어떤 문제도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란 맹목적 확신에 차있기도 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국 어떤 형태로든 관계는 외부에서 많은 도전을 받을 것이다. 나의 연인이 '움직이는 산'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 재평가할 기회는 얼마든지 인생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움직이는 산'이라고 연인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환상'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산이 움직이는지 아닌지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어느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 질문이다. 단지 그것을 인식할 기회를 무엇이 제공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반대로 산이 움직이는지 아닌지 평가할 '필요성'이 있는가? 건축가는 모든 일들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목적 자체가 불투명하다면 어떠한가. 장거리 관계가 앞으로 '결혼'에 대한 장애가 될 것이며 관계가 앞으로 불투명해질 것이라는 불안감은 '이 산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한 불안한 질문을 품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떠한가. 장거리 관계와 결혼의 연결점을 끊어내고 위기성을 거기서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집착 때문에 생겨나는 그 환상적 연관성을 끊어내고 냉철하게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다면. 목전의 '목표'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단지 건축가의 특성이며, 다른 이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에릭에게 앨리스와의 관계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성숙하게 다가가는 것이 관계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아는 것 처럼. 앨리스가 '관계의 역경'을 반드시 '미래'와 연결 짓고 질문해내는 성향을 끊어낸다면 또 다른 가능성(적어도 에릭이 마음이 편할 수는 있었을 거라는 것)이 있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언제부턴가 철학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할 때, 좀 더 '쉬운 고민'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와 더 복잡한 고민을 하게 하는 관계가 있다. 어느 날 문득 사랑에 빠진 친구가 이전에 보이던 모습과 괴리감 느껴지는 모습들을 보일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을 상기해보자. 예컨대 상대를 미화하고, 각자의 차이조차 그를 찬양할 만한 요소로서 바라보는 모습 등을 보일 때, 일상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로 회귀되는 것을 보여줄 때. 그 모습을 보며 사랑이라는 호르몬 작용이 만드는 근원은 불분명해도 특별한 형태의 행동양식을 나열해 보게 된다. 여행지에서 연인을 위한 선물을 고르는 것. 항상 연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그것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마음. 사소한 것일지라도 상대의 말들을 기억하는 것. 이러한 일련의 행동 양식의 근원은 동물적 본능과 후천적으로 습득된 사회적 행태의 연결성을 드러낸다고 나는 상상한다. 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무언가를 '주겠다'라는 양식으로 연결이 되는가. 반면 이런 마음은 시간이 지나 상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되는 듯 하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에서 남자주인공 닉이 던졌던 질문은 연인이 서로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무엇을 주고 받는가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질문을 던지지 않았나. "당신은 누구지?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무슨 짓을 하게 될까?"
그러한 행동양식을 시간 순서로, 일련의 연쇄 작용으로서 조직화 하고 설계도를 그리는 성향을 통해 '건축가'가 관계와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여기서 '건축가'라는 말은 마이어스 브릭스 심리 테스트에서 말하는 INTJ 성향을 대표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는 한 건축가의 사례를 통해 아래에 고찰하려고 한다. 건축가는 어떤 일을 경험하였을 때 시간이 흘러 과거를 조망할 수 있게 되면 가장 '건축가'다운 분석적 감상을 늘어놓을 수 있다. 이 '건축가'는 이전에 관계 속에서 '자선 사업가'와 같은 기질로 약간의 전향을 거친 적이 있다. 이 자선 사업가는 사랑이라는 호르몬 작용에 의해 발촉된 '상대를 위하여 가진 것을 주고, 심지어 희생 조차 하는 마음'의 형태로 해석하고 그것을 심지어 자신의 '사랑에 대한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이려 했다. 관계가 끝나고 건축가의 기질로 돌아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신의 기질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다 느끼고 드러내는 도취된 감정' 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건축가에게는 자신 조차 연구의 재료이다. 이전에는 사랑의 실패 요인만을 발작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약점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기 위해 상대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분노의 날을 세워 오던 건축가가 이제는 아예 사랑과 관계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건축가에게는 사랑이 끝난 다음에 사람들이 읖조리는 문구들이 다 하찮게 들린다. 특히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평범한 이들에게조차-에게 출판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요즘 시장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랑에 관한 시와 고찰을 담은 책들이 팔려 나가는 상황은 짜증을 유발한다. 건축가는 감성적인 접근이 아닌 학문적인 접근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감성을 자극하는 글들이야 많다. 하지만 정말로 왜 그러한 감정들이 나타나는가? '왜'라는 것은 어려운 질문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상황을 좀 더 큰 숲을 바라보는 형태로서 정리하는 인간은 왜 없는가? 즉 '어떻게'라고 묻는 인간은 없는 것인가? 건축가는 철학에 심취한다. 이전에 누군가가 건축가에게 우스개소리로 철학은 쉬운 것도 어렵게 설명하는 학문이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물어야 할 가치있는 질문을 품는 학문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인식의 성장 없이 저차원적으로 살아야했을 것이라고. 건축가 성향은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원제: The art of travel)>에서 밝힌 범인(凡人)들의 살아가는 양식에 대해 떠올릴 것이다. "여행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보통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왜'와 '어떻게'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왜"와 "어떻게"는 건축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그대로 드러낸다. 관계 속에서 절망을 겪을 때 건축가에게 "아 내가 지금 절망을 겪고 있구나" 하는 식의 차분한 명상은 가능하지 않다. 건축가는 언제나 "왜 너는 내게 이러는가?",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가?" 하는 질문을 속으로 되뇌인다. <The romantic movement>에서 앨리스가 에릭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자기 의심 극복과 이타심을 갖기 위한 노력 등도 이를 반영한다고 본다. 이제 앨리스가 본문에서 자신을 하찮은 인간으로 느끼게 되었던 기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들이대보자. 본문에 앨리스는 에릭의 행동 양식의 이유에 대해 십여가지 가능한 이론을 들 수 있다고 쓰여져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본문에서 에릭이 앨리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음을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빗대어 설명하였다.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개에게 종이 울릴 때 매번 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도 않기도 하는 상황을 만들어주자 개는 음식과 종소리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없어 혼란에 빠졌다. 에릭이 앨리스를 대하는 행동은 때로는 연인을 대하는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기도 하였는데, 이는 단 둘이 있을 때나 사교그룹에 참여하고 있을 때 등 많은 상황에서 변칙적으로 이루어져 앨리스를 신경쇠약 수준에 이르게 만들었다. 알랭은 "당신은 날 많이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압된 두려움과 내가 말도 안 되는 걱정으로 당신을 괴롭히면 안되는데 라는 타고난 심리적 규범이 폭발적으로 뒤섞여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애인의 편집증을 낳는 마법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면 '날 사랑하는가', '나를 사랑하다면 상대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옳은가' 라는 질문만 할 줄 알지, 상대가 항상 자신이 기대하는 바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하는 것 같다. 그의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마저 객관적으로 유지되기 보다 결국은 '그래서 날 사랑하는가 아닌가'란 질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앨리스가 자신이 보여야 할 반응 까지도 에릭에 대해 갖는 수십여가지 이론에 근거해 결정하였다는 점이 아닐까. 이는 감성적인 접근과는 거의 반대쪽에 있는 시도인데, 그러한 전략이 그녀가 겪는 '감정의 폭풍'을 잠재우기에 그다지 효과적인 시도는 아니란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즉 앨리스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없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눌러대어 억압된 감정은 결국 '그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불만과 의심으로 발전된다. 본문에서 앨리스와 에릭이 휴양지로 여행을 떠났을 때 앨리스가 읽던 책들의 제목(<친밀감 배우기>, <당신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하다>, <잘 사랑하고 잘 살기>)조차 '자선 사업가' 기질을 동시에 가진 '건축가'가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건축가는 억압된 감정을 상대에게 털어놓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지식'을 안다. 앨리스는 에릭과 관계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데, 사실 이는 단지 앨리스가 자신이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것을 통해 '감정의 교류'를 이루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앨리스에게 상대를 비판하며 악의 축으로 몰아낼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앨리스는 자신도 왜 이러한 비관적이고 암담한 기분 속에 가라앉아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털어내고, 그것을 상대가 알아차려 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에게 인간의 심리 기전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이다. 건축가들은 비판을 할 때에도 감정적인 접근은 저차원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지식과 이론에 근거하지 않은 비판은 자신을 저급하게 보이게 할 뿐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건축가는 대개 누군가가 관계에서 오는 고충을 토로할 때 "그 사람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니?", "그런 일을 겪다니 참 힘들겠다" 라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과 심리 수준에 대해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 발생 원인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에 걸맞는 반응을 제시해주려 한다. 앨리스 자신이 자신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과정이 그러했듯. 자신을 관계 속에서 '자선 사업가'로 인식하던 건축가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건축가 역시 앨리스 처럼 스스로를 납득 시키려 노력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을 때는 연인에게 그 힘듦을 토로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토로를 시작하기 전 항상 상대에게 '널 탓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단지 힘들어서 그래. 이런 나를 이해해줘' 라고 꼼꼼히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리 건축가가 그 사실을 상대에게 인지시키려 해도 상대는 늘 기분이 나빠진 상태가 될 것이란 것을 에릭을 통해 유추해보자. 건축가는 자신의 고민은 털어놓았지만, 그때마다 그 고민이 상대방에게 쓰레기 같은 짐이 되어서 오히려 연인이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도록 만든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것은 자기파괴적인 건축가에게 후회의 마음이 생기도록 만든다.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내가 좀 더 참을걸'하는 자책감이 들 것이다. 이때에 누군가 곁에서 분명 건축가가 믿지 않을지라 해도, '네가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라고 해줄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건축가는 관계가 끝나고 보다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었다.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건축가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말을 하는 것은 타당한 권리일지 몰라도, 그에 따라 오는 책임감 또한 각오해야 한다고. 여기서 말하는 '책임감'이란 작가 안대근이 <웃음이 예쁘고 마음이 근사한 사람>에서 쓴 시(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많이도 표절된)를 이용해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참다 참다 엄마한테 힘들다고 말하면 엄마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그 말과 동시에 엄마도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므로 힘들면 안 된다."
안대근 작가가 말하는 '안 된다'라는 말에 전지적 시점의 건축가들은 반대할 것이다. 여기서 '안 된다'라는 감정은 '엄마도 힘들어한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 '말을 뱉은 것에 대한 후회'를 반영하는 일시적 감정이지 모든 상황에 적용하거나 느끼기에 타당한 '이성적 감정'은 아니다. 이성적이긴 하여도 단편적인 감정이다. 인생을 차곡차곡 건축하고 발전시키길 원하는 건축가는 오히려 고민할 것이다.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으면서 나의 고민을 적절히 토로할 방법엔 뭐가 있을까'. 심리학자들이 자신의 환자들에게 관계 개선 처방법으로 '감정을 누르지 말고 상대에게 표현하여라' 라고 하는 것을 안대근이 말하는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라는 상황과 비교하여 보자. 여기엔 여성지도자들이 같은 여성들에게 '억눌리지 말고 표현하여라!' 라고 고무시키는 사례도 더해볼 수 있다. 건축가는 감성적인 글을 보고서 다음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질 자질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단 것인가?",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나만 힘들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 가져다줄 결과는 무엇인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게는 어떠한 비판을 할 여지도 없는 것인가?", "상대는 내게 무엇인가? 상대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인가?", "100% 똑같은 인간은 없을진대, 그럼 상대에게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가?", "내 고충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는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결국 질문들이 몇개가 되든, 결과는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관계를 지속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대근의 위의 글에서 나타나는 식의 결론은 건축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건축가가 자선 사업가이던 시절엔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건축가로 돌아오자 그 모든 것들이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수준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은 옳은 해석이지만 마치 코끼리의 다리만 만져보고 코끼리를 파악하려는 것과 같은 감상이란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엄마'에게 느껴야 할 미안함을 '연인'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의 부당성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건축가는 모든 수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며 선택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예상을 한다. 예상은 기대하는 바와 경험에 의한 지식이 섞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건축가에게 남은 해석은 두 가지가 됐다. 상대는 건축가의 말을 들어줄 정도의 의식 발달 수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상대는 건축가의 고민에서 자신을 비난해야 할 요소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이것은 보편적인 일인다. 자선 사업가는 자신이 상대에게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천추의 한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는 다르다. 건축가는 일이 이러한 기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에는 각오를 한 채 말을 하거나 혹은 말을 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 건축가에게 만족스러운 인생은 없다. 인생은 꿈꾸는 것이기 보다 오히려 꿈에 가까워지기 위해 갈고 닦아 나가는 것이다. 매 순간에 분석이 뒤따라야 하며, 이성과 합리에 근거한 선택들이 열거된다. 인생은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해석된다. 모험은 쓸데없으며, 모든 일들이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나아가고 싶은 방향과 나아가야 할 방향, 그러기 위해 갖추어져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 실패와 성공 모두가 연구 대상이며, 자신도, 인생도, 모두 연구의 과정이다. 건축가는 다음의 관계에서 '이전의 관계가 실패한 요인'들을 다시 발견하며 그것들을 이번엔 원활히 해결해 나갈 자신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해결에 기여할 '적절한 재료'인가 하는 관점에서 상대를 분석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실패요인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상대에게도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건축가는 실패요인을 더 확실하게 감지해낼 수 있을 것이며, 관계에 대해 '가망 없음'이라는 결론을 더 합리적이고 빠르게 내릴 수 있는 내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공을 다른 사람들이 일차원적인 평가로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 '나는 네가 있어 더 외롭다', '잡힌 고기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같은 말로 표현한 것에 비해, 건축가들이 위와 같은 많은 분석을 요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건축가'인 내가 느끼기에, <The romantic movement>에서 앨리스가 새로운 남자 필립과의 진지한 만남에 대해 지나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단순히 앨리스는 에릭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것 때문에 주저하는 것은 아니다. 앨리스는 분명 필립과 자신의 생리적 이끌림 보다도 기질적 연결성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분석을 완벽히 만들어주기에 아직 확연한 증거가 부족하고, 그렇기에 아직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용기가 있다면 결단을 앞당기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립은 분명 자상하고 문제를 직시할 성숙도를 지닌 인간일테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앨리스 만큼의 조심성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 필립조차 얼마 전 연인과 결별하지 않았는가. 앨리스와 필립의 관계가 결국 앨리스의 '결단'에 좌우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에 알랭은 앨리스를 마조히즘이 강한 여성으로 그리며 끝맺으려 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아무리 사랑을 쏟아부어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아는 그 상황에서 '나의 선물을 모두가 반겨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지' 하고 자학하며 순교를 계속해온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앨리스가 사랑을 표현하여도 받아주지 않았던 과거 남자친구들에 대해서는 '사랑을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이타심을 가졌으나 앨리스가 원하는 마조히즘을 채워주기 위해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자극적인 인물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 필립은 앨리스에게 자신의 마조히즘을 마주하게 하고 사랑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요컨대 동일한 수준으로 서로 주고 받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앨리스가 염원해 오던 안정감을 느껴보도록 해줄 사람일지 모른다. 이것조차 앨리스의 '관계 초반'에 갖는 '기대'와 '환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앨리스가 이제는 먼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보답하는 사람으로서 기능할 가능성을 비친다고 생각한다. 필립이 "키스해도 될까요?" 라고 묻자 앨리스는 대답한다. "내가 당신에게 돌려줘도 된다면." 앨리스의 이 결단이 앞으로 어떤 역학적 관계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본문에서 알랭이 했던 말을 다시 연상할 수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만일 앨리스가 에릭과의 관계에서 얻은 상처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상대에 대한 의존성과 기대를 줄이기로 한다면, 이미 앨리스에게 충분히 마음이 기운 필립의 상태를 고려할 때, 앨리스가 시작 단계부터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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