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도서/리뷰] 영혼의 연금술 (에릭 호퍼 Eric Hoffer) 본문
Read on 27 Aug 2018 - 04 Sep 2018.
에릭 호퍼의 <영혼의 연금술>은 대중 운동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인간 심리와 행동 양식을 설명하고자 한 책이다. 책은 여러 챕터에 나누어 논리를 전개 시켜 나가기 보다 고찰을 통한 단상들을 무질서하게 나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단상은 짧게는 한 문장에서 열 문장으로 이어지며 특유의 논리 전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번역본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글 번역문과 영어 원문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는데, 특히 본문 중 일부는 다소 기계적이면서 모호하게 번역된 부분들이 있어 원문을 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느껴진다.
대중 운동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 에릭 호퍼가 제시한 이론은 이미 많은 문헌들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호퍼는 대중의 저항성은 개인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이를 나약함, 자격지심, 낮은 자존감, 약점, 부적응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약점에 대한 개인의 인식은 분노라고 하는 큰 에너지로 변화되는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하지만 재능이 모자란 사람들은 동질의 '약자'들과 뭉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쓴다고 주장하고 있다.
책 중반에서는 약자들을 뭉치게 하고 실제 거대 사회 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서 '리더십'의 역할을 제시한다. 호퍼에 의하면 리더는 약자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믿음과 공포의 두 가지 심리를 지속적으로 심어줘야 한다. 여기서 공포는 사회 운동을 통하여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영역과 권리'를 회복하지 못하면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자존감 회복을 절대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심리 기전을 의미한다. 믿음은 사회 운동을 통해 실제로 약자 자신들의 권리가 회복되며 자존감을 낮게 만드는 요인,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인들이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실질적 믿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호퍼는 사회 운동을 하게 만드는 인간 심리를 통해 인간 행동 양식 자체를 객관화 하려는 듯 보인다. 혹은 사회 운동과는 별개로 인간에 대해 떠오르는 다양한 이론을 함께 제시하고 싶은 듯 보인다. 예를 들어 호퍼는 각 단상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사회 운동을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뒷쪽으로 가면서 사회 운동을 위해 뭉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논의의 주제가 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호퍼의 고찰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간파할 수 있을 때만 다른 사람도 간파할 수 있다.성공하는 사람들은 안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우리는 자기가 저질렀거나 저지르려는 죄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에게 쏟아질 모든 비난을 피한다.무례함은 강함을 모방하려는 약자의 행위이다.
이러한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는 와중에 마지막 단상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행복의 추구야말로 불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The search for happiness is one of the chief sources of unhappiness.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호퍼가 잘 알려진 관용어를 철학적 명제로서 고찰하고 있단 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문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의식할 때,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더 훌륭하고 선량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자기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면, 이를 그 사람의 무가치함과 열등함을 나타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서로 잘 알수록 무례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서로 잘 알수록 무례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의 영어 원문은 "It is thus that with some people familiarity breeds contempt" 로, 호퍼는 유사성이 무례함을 낳는 이유 중 하나로 '열등성에 대한 동질감'을 제시하고 있다. "Familiarity breeds contempt"는 미국 관용어 중 하나로 Geoffrey Chaucer의 소설 'The Tales of Melibee'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명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이는 '친밀해질수록 장점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단점만 보이게 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호퍼가 잘 알려진 기존 명제를 자기가 주장하는 논리와 연결하면서 그 명제가 갖는 의미에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글쓰기 방식이 상당히 재치있어 보이는데, 번역본에서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서구권 사람이 아닌 이상 이런 부분들을 모두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 아쉽다.
모든 단상들은 간결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매우 시니컬하다. 이 책의 제목인 '영혼의 연금술'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문장을 만 봐도 그렇다. "인간은 실로 매혹적인 피조물이다. 치욕과 나약함을 자부심과 믿음으로 바꾸는 짓밟힌 영혼의 연금술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한 문장이 사회 운동가들은 물론 보편적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논리와 저자의 자조를 담고 있다. 그래서 따지고 들어가면 몇 문장들에서 비논리적인 전개방향이 보일지라도 그의 문장들은 뿌리 깊은 주장력을 갖고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호퍼의 시니컬한 말투와 회의적인 태도에 더해 본문 사이사이 들어가 있는 그의 사진들도 보는 재미를 유발한다. 호퍼의 다른 책 <길 위의 철학자>와 <인간의 조건>에서 어떤 논리들이 전개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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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수전노, 건강 중독자, 영광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희생을 수련한다는 점에서 이타적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모든 극단적인 태도는 자기로부터의 도피이다. The miser, health addict, glory chaser and their like are not far behind the selfless in the exercise of self-sacrifice. Every extreme attitude is a flight from the self.
급변의 시기는 열정의 시기이다.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것에 적응할 수 없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변화에 맞춰 적응해야 하지만, 급하게 적응하다 보면 자존심에 위기가 닥친다. 우리는 시련을 견디며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급변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적응자가 되며, 이들 부적응자는 열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며 호흡한다. The times of drastic change are times of passion. We can never be fit and ready for that which is wholly new. We have to adjust ourselves, and every radical adjustment is a crisis in self-esteem: we undergo a test; we have to prove ourselves. A population subjected to drastic change is thus a population of misfits, and misfits live and breathe in an atmosphere of passion.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고의 자극은 도망가야 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The best stimulus for running ahead is to have something we must run from.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능의 자유를 누리게끔” 해방되어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할 때, 운명의 수레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 가치를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자율적인 인간은 문학, 미술, 음악, 과학, 기술에서 온갖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자기실현을 할 수 없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경우, 자율적인 인간은 욕구불만의 온상이 되고 세상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격변의 씨앗이 된다. 인간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안정을 유지한다. 자존심의 유지는 개인의 모든 힘과 내면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끝없는 작업이다. 모든 사회 소란과 대변동은 결국 개인 자존심의 위기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대중의 단결을 아주 쉽게 유도하는, 위업 달성을 향한 노력도 기본적으로는 자부심의 추구이다. A fateful process is set in motion when the individual is released “to the freedom of his own impotence” and left to justify his existence by his own efforts. The autonomous individual, striving to realize himself and prove his worth, has created all that is great in literature, art, music, science and technology. The autonomous individual, also, when he can neither realize himself nor justify his existence by his own efforts, is a breeding call of frustration, and the seed of the convulsions which shake our world to its foundations. The individual on his own is stable only so long as he is possessed of self-esteem. When, for whatever reason, self-esteem is unattainable, the autonomous individual becomes a highly explosive entity. He turns away from an unpromising self and plunges into the pursuit of pride-the explosive substitute for self-esteem. All social disturbances and upheavals have their roots in crises of individual self-esteem, and the great endeavor in which the masses most readily unite is basically a search for pride.
믿음과 공포는 둘 다 인간의 자존심을 말살하기 위한 도구이다. 공포는 자존심의 자율성을 짓밟는 반면, 믿음은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항복을 얻어낸다. 이 두 경우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없어지면 자동기계화가 야기된다. 믿음과 공포는 둘 다 인간이란 독립체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상태까지 전락시킨다. Both Faith and Terror are instruments for the elimination of individual self-respect. Terror crushes the autonomy of self-respect, while Faith obtains its more or less voluntary surrender. In both cases the result of the elimination of individual autonomy is-automatism. Both Faith and Terror reduce the human entity to a formula that can be manipulated at will.
“그래서 믿음은 “내려놓음”과 통한다.
대개의 일들에 대한 해석은 개별 경험과 가치관에 결정된다. 현상 이외의 아무것도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매혹적인 피조물이다. 치욕과 나약함을 자부심과 믿음으로 바꾸는 짓밟힌 영혼의 연금술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Man is indeed a fantastic creature; and nothing about him is so fantastic as the alchemy of his crushed soul which transmutes shame and weakness into pride and faith.
한 영혼의 약점은 멀리해야 하는 진실의 수와 비례한다. The weakness of a soul is proportionate to the number of truths that must be kept from it.
현재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잔혹해질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악랄해질 수는 없다. 무자비한 태도를 체계적이고도 일관적으로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Those who are in love with the present can be cruel but not genuinely vicious. They cannot be methodically and consistently ruthless.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때보다 그 사람의 정신을 파괴할 때 권력 의식을 강하게 느낀다. Our sense of power is more vivid when we break a man’s spirit than when we win his heart.
사람들은 자기의 장래성이나 불만, 의무와 죄에 대해 극도로 심각해진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심각함이 자신을 위장하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인생의 시시함과 허무함을 감춘다. people can be deadly serious about their prospects, grievances, duties and trespassings. The only explanation which suggests itself is that seriousness is a means of camouflage: we conceal the triviality and nullity of our lives by taking things seriously.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다. 인류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사람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It is an evil thing to expect too much either from ourselves or from others. One does not really love mankind when one expects too much from them.
모든 부적응자들의 마음속에는 인류 전체를 부적응자로 만들려는 강하고 비밀스러운 갈망이 있다. 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갈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할 때 모두 부적응자가 되기 때문이다. There is perhaps in all misfits a powerful secret craving to turn the whole of humanity into misfits. Hence partly their passionate advocacy of a drastically new social order. For we are all misfits when we have to adjust ourselves to the wholly new.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의식할 때,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더 훌륭하고 선량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자기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면, 이를 그 사람의 무가치함과 열등함을 나타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서로 잘 알수록 무례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When we are conscious of our worthlessness, we naturally expect others to be finer and better than we are. If then we discover any similarity between them and us, we see it as irrefutable evidence of their worthlessness and inferiority. It is thus that with some people familiarity breeds contempt.
우리는 전혀 근거 없는 허위 비난보다도 오히려 얼마간 정당한 비난에 대해 더 분개한다.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은 아마 분개할 수도 없을 것이다. We resent a wholly false accusation less than one which is partly justified. The blameless are perhaps incapable of resentment.
다른 사람의 평가가 그다지 많이 신경 쓰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견해에 관대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갈망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중요성이 두렵지 않다. 두려움과 옹졸함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When we are not governed too much by what other people think of us, we are likely to be tolerant toward the behavior and the opinions of others. So, too, when we do not crave to seem important we are not awed by the importance of others. Both our fear and intolerance are the result of our dependence.
자기 자신을 간파할 수 있을 때만 다른 사람도 간파할 수 있다. We can see through others only when we see through ourselves.
우리가 막 도약하는 순간에는 자기 입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 입지가 과연 견실한지 걱정하기 시작하는 때는 도약할 만한 장소가 전혀 없는 경우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안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We are not worried about our footing when we are about to jump. It is when we have nowhere to jump that we begin to worry about the soundness of our position. They who go places give no thought to security.
우리는 자기가 저질렀거나 저지르려는 죄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에게 쏟아질 모든 비난을 피한다. 그리고 기소장 문구에 불성실과 불신이라는 죄목을 추가로 덧붙인다. By accusing others of a crime we committed or are about to commit, we drain all force from any accusation which may be leveled against us. We attach a quality of hollowness and incredibility to the formula of indictment.
무례함은 강함을 모방하려는 약자의 행위이다. Rudeness is the weak man’s imitation of strength.
행복의 추구야말로 불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The search for happiness is one of the chief sources of un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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