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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tante Zen

[도서/리뷰]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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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Zen.dlt 2018. 7. 31. 14:24

마츠모토 세이초의 활동 시대 때부터 일본 추리/미스테리 소설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 새로운 공통 주제가 다시 등장했다고 느낀다. 요코미조 세이시 등이 주로 밀실이나 외부에서 차단된 공동 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룬 정통 추리소설의 붐을 일으켰고, 이후 요코야마 히데오 등을 거치면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지적' 하는 소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사회소설들에는 많은 스타일들이 있어서 스토리, 이슈, 인물내면, 해결점 등의 부분에 있어서 각 소설이 무게점을 두는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여류작가 미나토 가나에 등의 섬세한 필치와 반전이 남성 위주의 추리 소설 무대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이러한 이전 소설들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를 등장시켜 '선과 악'을 분간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주로 싸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 무자비한 음모 세력이 등장하는 소설이 이에 속하는데, <검은 집>, <머니론더링>, <데블 이 헤븐> 등이 속한다. 또한 이러한 소설들은 주로 소시민의 일상에 '범죄'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도면밀히 파헤치고 있는데, 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이던 이전 정통 추리소설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면들이다. 주인공이 일반인인 소설에서 이런 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엔 <푸른 불꽃>, <아름다운 흉기>, <이름 없는 독> 등이 있다.

최근의 소설들은 한 단계 발전하여 독자에게 많은 논제를 던져 주는 방식이 된 것 같다고 느낀다. 최근 읽은 이시카와 도모타케의 <그레이맨>과 히가시노 케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를 읽으면 제시되고 있는 논제가 단순하진 않다는 걸 느낀다. 즉 진짜 선과 악은 무엇인가, 선의 입장에 선 사람이 진정 선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도록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두 소설의 기반에 깔린 공통 심리기전은 '복수심'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복수의 결과물에 대한 고찰이 진행되며 복수심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의심이 드는 등 깊은 고찰의 기회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누군가가 타인이 갖는 복수심에 대해 쉽게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지 않은 것이 아닐까. 타인의 애통에 공감하면서도 제시할 수 있는 '최고격'의 도덕적 결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최고의 선이나 정의를 추구할 수 없을 경우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대체 최선과 최고의 경지는 누가 정할 권리를 갖는 것일까. 

<공허한 십자가>에서는 가족을 살해당한 유족의 삶의 행로를 통해 사형제도 찬반 이론을 대립시킨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사형 제도에 대해 상이한 의견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의견을 들여다보면 사형의 '목적'과 '이점'에 대해 단편일륜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딱한 사정(즉, 이해관계), 누군가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 찬반에 대한 의견을 정립한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은 가족을 살해 당한 후 사형제도에 대한 추적을 시작한 여주인공이다. 

<공허한 십자가>는 사형제도에 대해 특정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정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사형제도 찬성 입장의 인물이 주장하는 바가 더 설득력 있게 서술돼 있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소설에 등장하는 변호사는 사형을 선고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진심의 반성과 참회를 하지도 않기 때문에 사형은 무력하고 공허한 십자가(형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해자를 반성시키는 용도로서 최고의 형벌이 무엇인가' 라는 전제를 이미 가정하고서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며, 사형이 갖는 다른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각자가 서로 접촉 하지 않고 자기의 인견을 주장하는 구도 속에서 가장 혼란을 겪는 건 그들을 취재하는 여주인공이다. 

사형제도에 대해 피해자, 가해자, 지식인 측의 입장에서 다양히 살펴보려 했던 점이 인상적인 것 같다. 지식인과 가해자 입장에서 사형제도의 허술함을 지적하고자 했던 작품에는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 <데이비드 게일>이 있다. 사형제도가 가장 큰 주제이지만 살인을 둘러싸고 개인이 느끼는 감정라인을 조금씩 읽다보면 먹먹한 기분이 들며 개인의 삶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더불어 개인에게 주어진 행복에 감사하고, 선택에 책임감을 져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도 해볼 수 있다. 상당히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본문 중> - 스포일러 있으니 읽는 걸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사형이 확정되고 판결이 종결되면, 자신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다. 응어리를 날려 보낸다든지,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더 거창하게 말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지기는커녕 상실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때까지는 범인의 사형 판결을 받는다는 목적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지금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은 비단 딸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소중한 것을 수도 없이 잃어버렸다. 힘들게 손에 넣은 집도 재판 도중에 팔아버렸다. 그곳에 사는 것이 너무도 괴롭다고 아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도 어색해졌다. 배려 때문인지 어색함 때문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 직장의 업무도 달라졌다. 그는 이미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내의 환한 웃음을 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남은 인생이다. 그녀는 아직 젊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아마 자신과는 불가능하리라. 이미 두 사람은 몇 년이나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 중에는 슬픔에서 빨리 일어서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유형이 아니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아이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녀에게 다시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놓고 아직도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자신은 아직 혼자 서 있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서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그리고 아마 사형 판결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한 여자를 살해하고 돈을 빼앗았다…… 이 정도의 ‘가벼운 죄’로는 사형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이 나라의 법이다.

가쓰에의 말에 따르면 사쿠조는 그런 남자로, 어떻게 하면 빈둥빈둥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을 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어떤 일이든 오래 하지 않았다. 하나에는 아버지가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일하는 모습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돈도 벌지 못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바람을 피웠다.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상한 여자들을 끊임없이 만났다. 그래도 가쓰에가 이혼하지 않은 것은 오직 딸 때문이었다. 부모가 이혼을 했다고 하면 자식까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이다.

그녀는 도야마 현의 낡은 아파트에서 늙은 아버지와 재회했다. 사쿠조는 머리칼이 완전히 새하얘지고,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야위어 있었다. 하나에를 보는 눈에는 비굴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가 맨 처음 한 말은 “미안하다”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와 후미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유족은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해 범인의 사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상상해보기 바란다.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범인이 죽는다고 해서 피해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손에 넣으면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 수 있는가? 사형을 원하는 것은 그것 말고는 유족의 마음을 풀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을 폐지한다면, 그렇다면 그 대신 유족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묻고 싶다.”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각각의 사건에는 각각에 맞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자신은 지금까지 결말을 찾지 못해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사형 이외에 어떤 결말이 있다는 것인가? 일부 사형 폐지론자가 말하는 종신형을 도입하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에 대한 히라이의 대답은 “그것은 나도 잘 모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을 찾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가슴의 응어리가 풀릴지. 무턱대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요코는 달랐다. 자신들에게 그 재판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피고를 변호한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쪽의 시점만으로는 진정한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런 간단한 사실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그는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럴 겁니다. 히루카와는 사형을 형벌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요. 재판을 통해서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요. 그가 상고를 취하한 이유는 겨우 운명이 정해졌는데 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모든 게 귀찮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형이 확정된 후에도 편지나 면회를 통해서 나는 계속 그에게 연락을 했지요. 그가 자기 죄를 똑바로 바라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운명밖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 사형이 집행된 것은 아시나요?”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

그를 살려서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것은 국가다. 즉, 내 딸은 국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획적이든 아니든, 충동적이든 아니든, 또 사람을 죽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기형을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운데를 한 번 찢었을 뿐이기 때문에 읽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바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마음의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은 것이다.

본사에 근무하는 그는 엘리트 기술자였다. 어쩌면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온 것이다. 양다리를 걸쳤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와 헤어지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특별한 자극이 없는 평범한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잘하면 사무직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달콤한 희망은 이미 옛날에 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고 불안에 휩싸이는 일도 있었다. 주변의 동료들은 잇달아 결혼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출자를 하기로 했다. 다바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야 회사에 체면이 선다고 했다. 그의 환한 웃음을 보자 하나에도 기분이 좋았다. “단,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극비 정보니까.”

그 이후에도 그에게 몇 번 돈이 넘어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는 그때마다 결혼을 암시했다. 그 말을 들으면 그녀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즉시 답장이 오지 않아서 “되도록 빨리 돈을 보내주세요”라고 독촉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메일이 뚝 끊어졌다.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 메일을 보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불안이 소용돌이쳤다. 혹시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연락할 방법은 메일밖에 없었다. 그녀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명함을 꺼냈다. 그곳에는 직장의 내선 번호도 적혀 있었지만 일단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생각해보니 자기 인생과 엄마 인생이 너무도 똑같았다. 엄마도 아빠에게 속았다. 아니, 그래도 결혼을 했으니까 엄마 인생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사건을 생각해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솟구치지 않아요. 아마 마음이 죽어버린 것 같아요. 그때를 돌아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왜 그때 딸을 혼자 두었을까 하는 것뿐이에요. 딸을 지켜주지 못한 나는 이제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오리는 그쪽을 보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 젖가슴이 아플 만큼 팽팽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가슴을 만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평생 자신들이 행복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혼나지 않을까, 헤어지라고 하지 않을까 등등 사소한 것에 겁을 먹고 벌벌 떨었습니다. 아니, 저는 더 한심한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이런 일이 알려지면 제 장래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하고 거듭 말했다.

“사오리 씨 말에 따르면, 그로부터 반년도 못 되어 두 분의 만남은 끝났다고 하더군요.” 후미야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미 섹스도 하지 않게 되었지요. 저는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망설이게 되고, 둘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랬다고 하더군요. 사오리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을 땅속에 묻었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요.”

“그 사건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어서, 어떻게 하면 속죄할 수 있을지 생각했지요.”

“성실하게 사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죠.” 사요코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가령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거니까요. 아무리 반성해도, 아무리 후회해도, 한 번 잃어버린 생명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그 세월에 어떤 의미가 있죠? 당신도 아이가 있잖아요. 누군가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를 죽인 사람이 20년간 반성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나요?” 하나에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사요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난 당신 남편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요. 지금의 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니까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돼요. 당신 남편을 그냥 봐주면 모든 살인을 봐줘야 할 여지가 생기게 돼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겠지요. 이번에는 당신이 고민해서 내린 대답을 정답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하는 동안, 자신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남자와 섹스에 빠져서 결국 아이를 가졌고, 태어난 아이를 죽여서 땅에 묻은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한 것은 단지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주스러운 기억이 남아 있는 고향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순순히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