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도서/리뷰]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김재현) 본문
제목만 읽고 흥미를 느꼈는데 책 속 내용은 중간부분부터는 제목과 관련 없는 '인생 강의'내용으로 넘어간다.
왜 많은 기억들 중에 나쁜 기억만이 잊을만 하면 사람을 덮쳐 일상을 어지럽히는지에 대한 임상적 경험, 연구 결과, 학계 정설 등이 설명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저자 개인의 경험과 일부 인문학적 고찰들이 섞여져 짧게 소개 되어 있고, 제목 자체가 던지는 질문과 관련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감상이 들었다.
궁금해져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뇌를 공부하는 의사이자 비젼 강사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발전하는 삶'에 대한 일련의 조언들이 책의 중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가 '내가 스스로 평소에도 자주 읽는 격언'들이라 말하는 것에서도 느껴지듯, 저자 스스로에 대한 격려로 읽히는 부분이 많았다.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저자는 이런 기억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뇌에서 의식되고 있기 때문에 뇌가 이를 문득 생각나게 하며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결'의 일환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건 '발상의 전환'이다. 역지사지나 가볍게 마음을 먹는 것, 감정을 내려놓는 것, 아집을 내려 놓는 것 등이 과거의 일을 보다 객관적이고 감정적이지 않게 바라보는 방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로 정리된다.
결국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화하고 이제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발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어차피 '미래'에는 해결되어 있을 일이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에 충실해서 사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평범하고 보편적인 책에 내용을 아우를 수 있는 좀 더 포괄적인 제목이 붙어있었더라면 아마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라고 개인적으로 느꼈다.
(본문중)
나쁜 기억을 포용하기로 마음먹자 나는 생각이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타고난 열등한 조건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단지 이런 조건을 한계로 인식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문제다! 113이라는 아이큐도, 막노동을 해야 했던 가정환경도 그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오직 그런 환경을 한계로 인식한 자기 자신이 그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공자는 ‘인(仁)을 이루려면 예(禮)에 돌아가야 하는데 먼저 나[己]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부처 역시 ‘나’에 집착하는 것을 ‘아집’이라고 부르며 제자들에게 ‘아집을 갖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한동안 기억의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끝내 ‘기억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지, 한번 받아들이고 나니까 여러 모로 사람들을 대하기 편해졌다.
‘그래, 기억은 원래 부정확한 거야. 그런데 말이야, 왜 나쁜 기억은 마치 의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처럼 불쑥불쑥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기억은 퇴색하기 마련이라는데 왜 나쁜 기억은 갈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실패의 기억은 성공의 기억과 달리 자꾸만 우리를 찾아오며 우리에게 ‘야,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잖아! 어서 문제를 해결하란 말이야!’ 하고 우리를 달달달 볶는다.
성공 기억은 비슷한 환경에 놓였을 때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솔루션도 되고, 고양이에게 자부심도 안겨준다. 반면 실패의 기억은 어떨까? 고양이가 만일 실패했다면? 문도 못 열고, 생선도 얻어먹지 못한 채 쫓겨난 고양이는 이때의 상처를 두고두고 기억한다. 손다이크 박사의 상자 비슷한 모양만 보게 되면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치려고 한다. 잊으려고 하면 한 번씩 떠올라 심란하게 만든다. 고양이에게 당시의 기억은 쓰라린 상처이다.
그녀는 자꾸 떠오르는 나쁜 기억 때문에 고통에 빠졌지만, 기억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뾰로통한 얼굴로 자꾸만 자신을 찾아오는 기억을 떨쳐내려고만 애를 썼을 뿐이다.
이때 질 프라이스의 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첫째는 ‘새 구두를 살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별로 효용이 없다. 댄스파티가 이미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결책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볼 것’이다. 구두를 못 사서 괴로웠다기보다는 엄마에게 입은 상처가 계속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엄마를 이해 못하는 어린 나를 버리고 엄마를 이해하는 다 큰 ‘나’로 갈아타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엄마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혹은 엄마의 마음은 그 게 아니었는지 모르는 법이 아닌가. 나아가 왜 하필 엄마에 대한 안 좋은 기억만을 떠올리는가? 엄마가 나를 기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엄마가 나에게 베푼 사랑이 얼마나 큰지 조금만 돌이켜 보면 ‘엄마가 나를 미워했다’는 생각쯤은 떨쳐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 투정을 부린다. 큰 ‘나’가 되기를 거부한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한다. 서른의 나이에도 열 살짜리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뇌’가 지금 ‘나’에게 묻는다. 너는 왜 나이에 걸맞은 마음을 갖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정신병리학자인 E. H. 에릭슨과 사회심리학자인 G. 올포트는 ‘자기동일성’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자기동일성이란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똑같은 나라고 느끼는 경험을 뜻한다.
나쁜 기억의 극복을 위해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나쁜 기억을 바라보고, 지금이 아니라 훗날의 입장에서 나쁜 기억을 바라보자. 우리는 조금 더 확대된 나를 만들 수 있다.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당신에게는 수많은 ‘나’가 있다. 상처 받은 나, 위축된 나, 우울한 나…… 당당한 나, 미래를 보는 나, 기쁨의 나…… 당신은 그중 어떤 나로 오늘을 살았는가.
나중에 과녁을 그리라’고 가르친다. 보통은 과녁을 그린 후에 화살을 쏜다. 경기의 규칙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은 순서를 뒤바꾼다. 화살을 쏜 뒤에 과녁을 그려라. 이 말은 비유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재 다음에 미래가 오기 마련이지만 스승은 먼저 미래를 살아보고 현재로 돌아오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야 위대한 궁사가 될 수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대개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는 이유는 막상 지금으로서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미래의 시점으로 변경할 수 있다. 예컨대 10년 뒤에도 당신은 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을까?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까? 상상해 보라. 똑같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 10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반면 10년 뒤에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10년 뒤 고통에서 해방될까? 스승의 지혜로운 말에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나를 살펴보라’는 조언이 담겨 있다. 미래의 나는 분명 확장될 터인데 현재의 고통에 너무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차라리 고통 받고 있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미래의 나를 만들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나’를 비운다는 말은 ‘나’가 집착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버린다는 뜻이다. 예컨대 아내와 시계가 동시에 강물에 빠졌는데 아내는 내버려두고 시계를 먼저 건지러 간 사람을 우리는 시계에 집착이 강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나’가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온통 마음이 집착하는 그 무엇으로 가득 차서 뇌의 활동을 방해하게 된다.
벨 박사의 명언을 떠올려보자. ‘누구나 사물을 바라보지만 아무나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현상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취할 뿐 그 너머의 진실에 대해서는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2~3가지 지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우리는 나머지 7~8개의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성향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는 좋은 면만 보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서는 싫은 면만 보려고 한다. 이는 객관적인 태도가 아니다. 객관적인 태도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히고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되며, 올바른 판단을 그르친다. 마음이 자꾸만 한쪽으로 쏠린다면 생각을 멈추고 편견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편견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일도, 어떤 사람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예전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정체되어 있다’고 표현한다.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도, 성격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정체된 사람이다. 몰레이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해마를 갖고 사는 사람답게 해마를 적극 활용하여 ‘변화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나 해마를 갖고 있지만 아무나 해마를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논어>뿐이 아니다. 어떤 경험을 겪든 어떤 책을 읽든, 전혀 얻은 것이 없다면 그는 왜 사는 것일까?
자신의 일상 가운데 유사한 상황을 비유로 들어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준 후에 자신의 생각을 곁들였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친구가 답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없앴어. 기대를 접고 나니 아이들이 보이더라.” 기대를 없앴다는 말은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눈[雪]을 보면서 감탄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기대치, 고정관념, 비교 등등…… 무엇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이유가 나의 기대치 때문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낡은 개념을 벗겨낸 뒤 날것 그대로의 사물을 만나면 상상력은 비로소 날개를 단다. 자유로운 연상이 가능해지고, 때로는 세상에 없었던 발명이나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를 낡은 옷을 벗겨버리고 새로 디자인한 옷을 입히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시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_김춘수, <꽃> 가운데.
그렇게 결합한 새로운 의미들은 어느 날 ‘나’의 의식으로 또렷이 떠오른다. 아무 이유가 없다.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생각이 우리에게 오는 일은 다른 것으로 설명이 안 된다. 뇌의 신비일 뿐이다. ‘문득’ 생각이 일어나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낄 때만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뒤로 한 채 명령, 비난, 비판 그리고 불평의 말들을 토해 놓았다. 아이가 글을 깨우친 어느 날, 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액자의 글과 마주했다. 그 속에는 그간 내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 숨어 있었다.
하나의 새로운 행위가 뇌에 각인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투자한다고 가정했을 때, 인간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약 30일이 필요하다. 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신경연결회로의 재배치가 이루어지기까지 30일이 걸린다는 말이다.
반복은 해마를 자극하여 기억력의 수준을 상승시킨다. 해마는 반복 입력되는 정보를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중요 자료로 인식한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반복해서 입력하거나 잠들기 전에 반복하는 정보는 우선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작심삼일을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 마음먹은 지 삼 일이 지나면 마음은 나약해져 포기를 외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늘부터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단순히 작심삼일을 반복하라는 말이 아니라 목표 설정을 삼 일마다 한 번씩 새롭게 하라는 뜻이다. 삼 일이 지나면 상황은 변한다. 상황이 변했으므로 문제의 해결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의 변수를 모두 점검하고 이를 문제 해결 방식에 반영해야 한다. 한 달 전에 분석한 데이터, 한 달 전의 인식 그대로 오늘의 문제를 대해서는 안 된다. 그 CEO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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