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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tante Zen

[도서/리뷰] 브루클린 (콜럼 토빈) - 타향살이와 정체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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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브루클린 (콜럼 토빈) - 타향살이와 정체성

Zen.dlt 2018. 7. 31. 14:13

추리소설에 관심을 끄고 성장소설로 관심을 돌린지 얼마나 된걸까, 거의 1년이 된걸까. 그러던 와중 우연히 e-book 목록 뒤지다가 브루클린 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대여하게 된 이 책. 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아일랜드의 한 젊은 처자가 미국에서 온 신부님과 자기 언니의 도움으로 미국에 취업 이민한 후 겪는 에피소드와 심정 변화들을 소소하고 담담한 문체로 담은 소설이다. 현재 타지 (브루클린에서 기차 2시간 거리)에서 살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주관적인 리뷰를 간만에 써 보려고 한다. 

소설을 읽고 역자의 후기에서 알게된 일이지만 아이랜드는 영국의 식민 지배와 전쟁 등을 거치면서 망명, 이민 이라는 주제를 통한 정체성 찾기를 항상 소설의 소재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있는 아일랜드의 소녀 아일리시. 앞서 언급한 신부님이 아일리시의 능력을 눈여겨 보고 조력자로서 그녀를 미국에 오게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아일리시는 신부님과 가족의 응원에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며 미국에 왔다는 점이다. 아일리시의 오빠 언니들은 몸이 안 좋은 언니(로즈)만을 뺴고는 모두 타지에 가서 홀로 생활 중이다. 미국행 배에서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던 아일리시는 미국의 하숙집에 도착해 자기 방을 갖고 나서야 먹먹한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압도 당한다. 

"잭 오빠가 했던 말 가운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는데, 어떤 일에든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했을 거라는 그의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편지에선 전혀 그런 말이 없었다. 아일리시는 지금 오빠에게 편지를 써서, 오빠도 이랬는지, 어딘가에 격리돼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갇힌 기분이었는지 물어볼까 했다. 이건 지옥 같아, 아일리시는 생각했다."

사실상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합법적으로 취업 이민 과정을 밟았지만 아일리시가 느끼는 이질감은 비슷한 입장에 있어 보지 않고서는 알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무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가 없고 가족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그보다는 이 방에서, 직장으로 가는 거리거리에서, 매장에서 그녀가 유령이라는 뜻이었다.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프라이어리 가에 있는 집의 방들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 방들을 돌아다닐 때면 그녀는 진짜 거기 존재했다. 고향에서는 가게나 직업 학교에 걸어갈 때면, 공기, 빛, 땅 모든 것이 견고했고 모든 것이 그녀의 일부였다.아는 사람 한 명 만나지 않아도 그랬다. 여기엔 그녀의 일부인 게 하나도 없었다."

저자가 위와 같이 감성적으로 표현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의지할 곳 없다' 라는 감정일 것이다.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 '공동체' 라는 것들은 배를 타고 옴과 동시에 물리적으로 먼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우리는 항상 일상생활을 누려오던 환경이 주는 안정감, 보호감 같은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은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따뜻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들이다. 

그런 와중에 아일리시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하숙집에 사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본인의 기질 때문이다. 아일리시가 들어간 하숙집의 주인여자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하숙인들도 모두 아일랜드에서 온 여성들이다. 그런데 아일리시는 오히려 같은 고향 출신인 이 사람들에게서 '텃세'와 '경계심'을 느낀다. 사실 이 점이 많은 이민자들이 좌절하게 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타지에 가기 전엔 그 지역 사람들의 텃세에 눌릴 거라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간다. 하지만 같은 민족,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 타지에서 주는 배척은 실제로 그 타격이 굉장하다. 단지 그 환경이 '고향'이 아니며, 그 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이다. 여기에 아일리시는 이민자가 겪을 법한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열병을 겪고 지나간다. 매우 짧은 문장이었지만 난 아래 구절의 '그들의 동기를 나쁘게 해석하는 자신이 문제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라는 부분에서 그걸 강하게 느낀다. 이런 혼란은 환경(거주지, 직장, 학교 등)이 급격히 변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다행스럽게 아일리시는 이런 현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비교적 빠르게 깨닫는다. 바로 '무시'하거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숙생들 가운데 속마음을 털어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는 게 아쉬웠다. 어쩌면 사람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데 그들의 동기를 나쁘게 해석하는 자신이 문제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밤에 잠을 깼을 때나 직장에서 천천히 일할 여유가 생길 때면, 아일리시는 모든 것을 되짚어 보곤 했다. 그러나 한순간은 키호 부인을 원망하다가도, 다음 순간은 미스 매캐덤과 다른 하숙생들을 탓하고, 그러다 자기 자신을 탓하고, 결국에는 그 모든 생각을 그만두는 게 최선이라는 것밖에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아일리시가 이질감을 느끼는 이 하숙생들의 평소 소망(?)이라는 것을 들여다보자. 감히 말하건데 이들의 소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아일리시가 이들에게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도 한 장을 부엌 식탁 위에 펼쳐 보여 주더니, 아일리시가 맨해튼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거기가 얼마나 근사한데.」 다이애나가 말했다. 「5번 대로야말로 천국과 가장 비슷한 곳이지.」 패티가 말했다. 「거기서 살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걸 다 줄 거야. 5번 대로에 아파트를 가진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가난뱅이라도 괜찮아.」 다이애나가 말을 받았다. 「아파트만 가지고 있다면.」 " 

비록 자기 의지대로 미국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한 불안감을 이제서야 신선하게 갖기 시작한 아일리시에게는 자립심이라는 것이 샘솟고 있다. 마침 신부님이 야간학교에 부기 과목도 등록해준 참이다. 지금은 옷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지만 2년 과정을 끝내고 나서는 사무실에서 일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비록 아일리시가 인지 하진 못하더라도 이 꿈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부채질이며, 그 이전에 타지에 던져진 여성의 자립과 존재 가치를 부추기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하는 아일리시와 달리 이 여성들은 이미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이고 같은 하숙집에 살지만 그들의 이상과 성향이 아일리시로 하여금 섞이질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아일리시가 수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일리시는 "내가 이상한건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하숙집 여성들의 텃세는 아래와 같이 점차 불쾌하 것으로 에스컬레이트 한다. 그이들은 하숙집에 새로 들어온 여자에게 '걸레'라고 하며 따돌리자고 부추긴다. 

"아일리시는 그들의 얼굴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리고 다시 책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린 그냥 너한테 알려 주는 거야.」 다이애나가 말했다. 「그 애는 캐븐에서 온 걸레라고.」 미스 매캐덤의 말에 다이애나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난 네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 미스 매캐덤이 다이애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 미안해요. 그냥 끔찍해서요. 어쨌든 점잖은 사람들은 우릴 아는 체도 하지 않을 테니까.」  사무실에서 일하는 이 두 사람이 혹시 자기가 여기 처음 왔을 때에도, 가게에서 일할 거라는 이유로 자신에 관해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리시는 그들의 얼굴 앞에서 세게 문을 닫아 버렸다."

이런 텃세는 사실 이민자의 입장에서 갖는 불안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사무실에서 일하면서도 더 높은 곳을 지향할 때,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이라는 것으로 상징된다고 할 때, 이들은 조금도 없어보이고 싶지 않다. 그들은 뉴욕시티 맨하탄을 바라보지만 외곽 브루클린의 허름한 하숙집에 살고 있다. '비록 내가 하숙집에 산다고 해도 너와 동급은 아니다' 하는 이런 텃세. 이것이 곪으면 같은 커뮤니티 안에서도 배척과 멸시가 증폭되게 된다. 

아일리시는 아직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일리시는 별 기대없이 하숙생들과 함께 갔던 (아일랜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금요 무도회장에서 토니라는 브루클린 출신의 현지 남자와 춤을 추고 함께 빠져나오게 된다. 대화를 나눠 보니 이 토니라는 남자의 태도도 재미있다. "난 사실 브루클린 사람이 아니야. 사실 우리 부모님은 이탈리아 사람이야."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토니 역시 이민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씁쓸한 사실이다. '넌 나를 미국 남자로 알았겠지?' 그리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은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소설에서 묘사되기로)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신용도가 낮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보다 우호적으로 현지인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토니 역시 아일리시가 아일랜드 여성이기에 끌렸던 것이다. 여기에 아일리시가 토니에게 하는 질문은, 만약 내가 토니였다면 아일리시에게 두번 반하게 하는 질문이다. "어떤 여자라도 아일랜드 사람이면 된단 말이야?" 

몇번 만나면서 토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도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한다. 그는 배관공이었으며, 아일랜드 여성(특히나 아일시리의 하숙집 여성들)이 선호할 맨하탄 거주 남성들과는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토니는 이 점에 대해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종의 열등감이 있어 아일리시에게 당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아일리시는 그의 배경에 대해 전혀 어떠한 경멸도 갖고 있지 않다(이 점이 하숙집 여성들과 너무나도 대비되어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불안하다면 불안하지만 풋풋한 상태로 둘은 만났다. 그리고 토니와의 만남은  온종일 고향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지울 수 없었던 그녀의 정신 상태를 지배한다. 

"지난번에 만났던 남자가 자신을 데리러 집에 올 거라는 생각, 무도회가 끝나면 그가 하숙집까지 바래다줄 거라는 생각뿐이라니…. 그녀는 머릿속에 집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 못하게 노력하면서, 편지를 쓰거나 받을 때에만,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나 언니, 프라이어리 가 고향 집의 방이나 마을의 거리들이 나오는 꿈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에만 잠깐씩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향에 대한 기대로 차 있어야 할 머릿속을, 뭔가에 대한 기대를 음미하는 단순한 감정이 한동안 대신 차지할 수 있다는 건." 

이제 이야기는 다소 유머러스해진다. 이 둘의 연애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지만 그런대로 귀엽다. 가령, 아일리시의 옷가게 동료가 토니가 이탈리아 사람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은 지극히 여자들다운 대화이다. 

"자기도 이탈리아인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골칫덩어리일 뿐이었으며 야구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더 나빠지곤 했다고 말했다.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어떤 여자도 곁에 두지 않고 그저 친구들과 술 마시고 경기 얘기만 하려고 했다는 거였다. 토니가 야구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고 하자, 미스 포티니는 한숨을 쉬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미스 포티니라는 이 친구는 토니의 좋은 점까지 이끌어 낸다. 

"「잠깐만. 그 사람이 자기 친구들과 술 마시는 데 널 데려가서, 여자들끼리만 남겨 두지는 않니?」 「아뇨.」 「항상 하는 말이 자기 얘기이거나, 그러지 않으면 자기 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지 하는 얘기는 아니고?」 「아뇨.」 「그럼 그 사람 꽉 잡아. 그만한 사람 없어. 아일랜드에는 있을지 몰라도 여기엔 없어.」 둘 다 웃었다." 

미스 포티니의 경고대로 야구 시즌이 되어 둘이 야구장에 데이트를 갔을 때, 토니는 거의 아일리시를 무시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아일리시의 매력이 이점이다. 그런 토니에 대해 '귀여움'마저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야구 시즌 시작 전 이 커플에게 하나의 장벽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아일리시에 비해 토니가 앞서가고 있다고 아일리시가 느꼈다는 점이다. 바로 토니는 이 멋진 아일랜드 여성과 함께 할 미래에 대해 꿈꾸기 시작했단 것이다. 그들이 만난지 5개월이 되었을 즈음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가 물었다. 「우리 아이들을 다저스 팬으로 키우는 거야.」 그는 그 생각에 기쁘고 흥분이 되는지, 아일리시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일리시는 빨리 그와 헤어지고 혼자서, 방금 그가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싶었다. 나중에 침대에 누워 그 말을 생각하던 아일리시는, 그 말이 그가 요즘 구상 중인 여름휴가를 비롯해 많은 시간을 아일리시와 함께 보내겠다는 그의 계획과 딱 들어맞는다는 걸 알았다. 더구나 최근에 토니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난 후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답을 바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아일리시는 대답한 적이 없었다. 이제 깨달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었고, 아이들을 낳아 다저스 팬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이 만난 지 거의 다섯 달이 되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말다툼이나 오해도 없었다. 다만 이것, 아일리시와 결혼한다는 그의 계획이 엄청난 오해라는 것만 빼면. 토니는 배려 깊고 재미있고 잘생긴 남자였다. 아일리시는 그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대하는 모습이나 그녀가 말할 때 귀담아듣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한편으로 아일리시는 토니가 자기보다 생각이 앞서 간다는 걸 알았고, 그의 속도를 늦춰야 할 필요성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토니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어떻게 그 말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다음 주 금요일 밤,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토니와 껴안고 있는데, 그가 다시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일리시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키스를 하더니 다시 그 말을 속삭였다. 예고도 없이, 아일리시는 그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가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니이 마음이 부담스러운 이유에 '이게 진짜 사랑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은 떠나서 아일리시를 괴롭게 하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아일리시는 토니와의 결혼에 대해 '고향과의 완전한 이별' 이라고 확대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분명 토니는 아일리시로 하여금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잊게 할 존재이기는 했고 그렇게 큰 존재로서 만남을 시작했지만, 고향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게 할만큼의 존재인 것인지 아직 아일리시는 확신할 수 없는 단계이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과, 대답을 바라는 그의 기대가 두려웠다.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평생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말없이 걷다가 하숙집에 도착했을 때 아일리시는 오늘 밤 고마웠다고 형식적으로 말하고는 그와 눈 마주치기를 피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일리시는 자기가 한 짓이 옳지 않다는 것, 지금부터 다시 만날 다음 주 목요일까지 토니가 괴로워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토요일에 그가 자신을 보러 잠깐 올지 궁금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토니에게 만나는 횟수를 줄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서로 사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아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할지 도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에 토니가 자기와 사귀는 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어 온다면, 그리고 그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때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이 그에게 충분히 고무적이지 않다면 그녀는 그를 잃을 것이다. 토니는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여자 친구와 즐겁게 만날 사람이 아니었다.그쯤은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아일리시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런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아일리시를 바라보는 토니의 모습은 위태롭기 그지 없다. 어느 날 야간 학교가 마친 즈음 아일리시를 마중나온 토니의 모습에게서 '속수무책의 감정'이라는 것이 엿보이고, 아일리시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성숙한' 여성이었다.

"거기 서 있는 그에게는 뭔가 속수무책의 느낌 같은 게 있었다. 즐거워지고 싶은 의욕, 또는 열정이 이상하게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기쁨〉이란 단어였다. 그는 아일리시를 보고 기뻐하듯 매사에 기뻐했고,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 외에 달리 그가 하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그 기쁨에는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다. 그를 지켜보면서 아일리시는, 그 그림자는 어쩌면 그에 대한 감정이 불확실하고 그와 거리를 두려는 그녀 자신이지 다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는 아일리시의 눈에 비친 그대로였다. 그에게 다른 면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아일리시는 두려워서 소름이 돋았고, 얼른 몸을 돌려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로비에 있는 토니에게 다가갔다."

"토니는 아일리시가 함께 갈 수 있다면, 로런스와 모리스와 프랭키도 같이 갈 수 있다면, 그리고 다저스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다면 올해는 완벽한 해가 될 거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그가 다저스 팬이 될 아이들을 갖자는 계획에 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이 다음에 연애 감정, 인생 개척의 여러 의미에 있어서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 해서 일어나고 복합적으로 연결되며, 그 과정 속에서 아일리시가 느끼는 감정을 초근접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단 점이다. 우리는 청춘 시절에 남자친구가 고시 패스 하더니 여자 친구를 버렸다는 둥, 여자는 이미 취직 했는데 남자친구는 아직도 학생이라 결국 헤어졌다는 둥 이런 에피소드를 많이 듣게 된다. 과연 아일리시가 불안정한 마음을 갖고서 계속 토니를 만날 수 있을까? 토니는 아일리시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 대한 이야길 하는 건 잠시 접어두었고, 아일리시는 거기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던 중 아일리시는 드디어 부기원 시험 합격 통보서를 받고 사무실에서 일할 미래에 한걸음 더 다가선다. 이 사건이 아일리시에게 안겨준 자신감과 행복은 아래와 같다. 

"브루클린에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편지가 기운을 주고 새로운 자유를 준 것 같았다.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일리시는 플러드 신부가 사제관에 있다면 이 편지를 보여 줄 생각에, 다음 날 약속대로 토니를 만나면 토니에게도 보여 줄 생각에, 그리고 편지로 이 소식을 집에 알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1년 후면 정식 부기원이 되어 더 나은 일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 1년 동안 날씨는 점점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워지고 다시 열기가 수그러들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릴 것이며 그러면 브루클린에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겨울 또한 봄으로 녹아들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햇빛이 남아 있는 초여름이 되었다가 그녀는 다시, 브루클린 칼리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사실 아일리시는 아일랜드에서도 부기원이 되고 싶었지만 아일랜드 고향은 일거리가 없는 소도시였다. 부기원 시험 합격 통보서는 꿈의 일부를 성취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 바로 이 꿈의 합격서가 단지 '미국'에서 발행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아일리시에게 하나의 '확신'의 싹이 움텄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건 바로 고향과 떨어져 타지에 살아도 한 몫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아일리시에게 어렴풋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비록 아일리시가 이 점을 인지할 수는 없었을테지만, 그 순수한 기쁨 속엔 그런 감정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이렇게 순탄대로만을 보여주진 않는다. 행복한 날을 보내던 아일리시에게 아일랜드에 남겨져있던 언니 로즈의 부고 소식이 전달된다. 신부님이 직접 아일리시에게 사실을 전달하고, 아일리시는 언니는 물론 엄마에 대한 걱정에 압도된다. 아래는 신부님과 아일리시의 대화이다. 

"「이제 다시 언니를 못 보겠네요.」  「로즈는 네가 잘하고 있어서 얼마나 대견해했는지 모른다.」 「다시는 언니를 못 볼 거예요. 그렇죠?」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아일리시. 하지만 언니는 지금 천국에 있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바로 그거란다. 그리고 언니는 널 지켜보고 있을 거야. 우리는 네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로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겠지. 그리고 아일리시, 우리는 신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해.」 「애초에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일리시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 말을 반복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밖에 차를 세워 두었으니 어서 사제관으로 가자꾸나.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게 너한테 좋다는 건 너도 알잖니.」 「집을 떠난 후로 엄마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아일리시가 말했다. 「그냥 편지만 했어요.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니 정말 너무했네요.」 「나도 안다, 아일리시. 어머니도 같은 생각을 하실 거야. 퀘이드 신부님이 어머니를 모시러 가서 사제관까지 태워다 주신다고 하셨어. 어머니도 충격에 빠져 계실 거다.」 「엄마한테 뭐라고 하죠?」 "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 처럼 아일리시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것이다. 만일 아일리시가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로즈 언니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을 지 모를 일이다. 아니 그 이전에, 브루클린에서 지내던 시절을 로즈 언니와 더 값지게 보냈을지 모를 일이다. 가족의 일부가 죽었을 때 타향살이 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그리움'이나 '놀라움'을 넘어서서 '후회'와 '자책'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단 몇 문장만으로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래에 드러난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브루클린에서 보낸 그간의 시간, 모든 일이 하찮아 보였다."

"아일리시는 언니한테서 받은 편지 묶음을 바라보면서, 이 가운데 어느 한 통과 한 통을 보낸 사이에 언니가 자기 병을 알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아일리시가 떠나기 전에 이미 알았던 걸까? 그 가능성은 아일리시가 브루클린에서 보낸 그간의 시간에 관해 생각했던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찮아 보였다.그녀는 로즈의 글씨를 보았다."

아일리시는 언니 장례식 시간엔 맞출 수 없어도 혼자 남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로 한달간 휴가를 가기로 한다. 그런데 토니는 아일리시가 한 번 떠나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며 가기 전에 사랑의 증표로 결혼을 해달라고 한다. 토니는 이미 이 전부터 롱아일랜드에 사놓은 땅이 있으니 거기에 집을 짓고 살 것인데 함께 살아주겠니 하고 아일리시에게 암시를 많이 해오던 터였다.아일리시는 처음에는 '돌아온다' 하고 설득을 하지만 토니가 굴복하지 않자 (내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이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아일리시는 이게 잘하는 짓인가 불안해 하면서도 반지를 구하고 토니와 조촐하게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돌아간 아일리시는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는데도 그다지 편하지가 않다. 첫째, 엄마가 자신의 미국 생활이 어땠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 둘째, 주변 사람들에게 아일리시를 자랑하기만 한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불편한 것은 이런 엄마의 부산한 모습 때문에 아일리스가 '엄마에게 상의도 없이 미국에서 결혼을 해버렸단 껄끄러운 사실'을 고백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엄마에게 드는 서운함과 미안함과 같은 상반되는 감정은 아래에서 묘사된다. 

"그러다 갑자기, 전에는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그녀 사이에는 항상 로즈가 있었다. 로즈는 두 사람 모두에게 할 말도 많았고, 질문도 많았고, 들려줄 평이나 의견이 많았다. 단둘이 있기는 엄마한테도 힘들 거야, 아일리시는 생각했다. 결국 며칠 더 기다리면서 어머니가 그녀의 미국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그래서 서서히 토니 얘기를 꺼내고, 미국에 돌아가면 토니와 결혼할 거라는 말을 할 만한 분위기가 될지 두고 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가족 묘역이 있는 곳을 향해 묘지 안의 큰길을 걸어갈 때에야 아일리시는 자신이 이 일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 어머니에게 많이 짜증 냈던 게 미안해져서, 천천히 걸음을 늦추면서 화환을 든 채 어머니의 팔짱을 꼈다. 묘지에 서 있던 몇몇 사람이 무덤으로 다가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고, 덕분에 아일리시는 마음이 놓였다.요 며칠 사이에 둘 사이의 침묵이 두려워지면서, 딸의 미국 생활에 관해 어떤 것에도, 아무리 사소한 얘기에도 관심이 없는 어머니가 야속해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일리시의 마음에도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난다. 아일리시는 한달만 체류하기로 하고 온 것이었지만 어린시절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일정 때문에 2주를 더 머물기로 한다. 더군다나 미국으로 떠나기 전 썸을 탔던 남자 '짐'과의 재회는 아일리시의 마음에 혼란스러운 돌을 던진다. 아마 이 때가 타향생활을 통해 자신이 이미 달라져 버렸다는 점을 인지한 순간일 것이다.  

"이제 아일리시는 토니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또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나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는 까닭에 미국에서 보낸 나날들이 고향에서 보내는 이 시간과는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일종의 환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둘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브루클린에서 두 번의 추운 겨울과 힘들었던 숱한 나날에 맞서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졌던 한 사람과, 어머니의 딸로서 모두가 아는, 아니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또 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비록 몸은 아일랜드에 있고, 먼 브루클린에서의 일들이 꿈 같기는 해도 아일리시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억지 노력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억지 노력이야 말로 그녀가 진짜 자신으로서 '도약'하기 위한 발버둥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로 그 생각들이 날카로운 일깨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느덧, 토니와 진짜로 결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려면, 또는 브루클린의 숨 막히는 더위, 바르토치스 매장의 일상적인 따분함, 키호 부인 하숙집 방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려면 일부러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이상한 사람들과 이상한 억양들, 이상한 거리들로 가득한 삶으로, 지금 생각하면 시련으로만 여겨지는 삶을 마주할 것이었다. 아일리시는 사랑과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토니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그녀가 바라서든 아니든 간에 동맹을 맺은, 그 동맹의 성격과 그에게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그녀가 잊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사람이 보일 뿐이었다."

물론 이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아일리시는 친구의 결혼식 당일, 감격에 찬 상태에서 아예 브루클린의 일들을 아득히 지워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혼란스러워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몸이 멀어져서 마음이 멀어진 것'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상투적인 표현을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해낸 작가에게 감탄한다. 

"낸시와 조지가 함께 중앙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저 달콤함, 확실함, 순수함의 편에 같이 낄 수만 있다면, 어리석고 속상한 일을 저질렀다는 회오의 감정 없이 새 삶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내가 했던 일의 결과를, 혹은 내가 지금 하는 일의 결과를 피할 방법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짐과 어머니와 나란히 중앙 통로를 걸어 교회 밖으로 나와 화창하게 갠 하늘 아래 하객들 사이에 합류하면서, 문득 아일리시는 지금은 토니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토니는 그녀가 꾸던 꿈의 일부인 것 같았다. 얼마 전 큰 자극을 받고 깨어난 꿈. 그리고 깨어 있는 지금 이 시간에, 한때 너무도 견고했던 그의 존재에는 어떤 실체나 형체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낮과 밤 매 순간의 끝자락에 드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결국 아일리시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각오는 아일리시가 결혼식 후 언니가 묻힌 묘비를 찾아가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아일리시는 여기저기 묘비에서 자기가 아는 이름들, 학교 친구들의 부모나 조부모들,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 지금은 모두 죽어서 시내 변두리 이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보았다. 지금 그들 대부분은 산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겠지만, 그 기억도 계절이 한 번 지날 때마다 서서히 희미해져 갈 터였다."

아무리 같은 장소에서 수십년을 살고 모두에게 기억된 자들도 결국은 그 곳에서 잊혀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앞서서 아일리시가 토니와의 미래는 '고향과의 단절'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그녀는 이미 엄마와의 심리적 거리감에서, 너무 화려해진 (미국 물을 먹은) 자신을 경외시하는 친구들에게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단절'은 이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아일리시에게 브루클린으로의 복귀를 결심 짓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묘비에서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길에 이전에 알고 지내던 여성과 잠시 만나는 아일리시. 알고 보니 그 여성의 친척이 브루클린 하숙집의 주인이며 전화를 통해 그곳에서의 생활을 다 몰래 전해 듣고 있었다고 그 여자가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태도는 경멸스럽고 천박하다. 이 여자로 인해 아일리시는 꿈 같았던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나는 토니와 결혼했고 그것이 현실이다!' 

아일리시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참아온 울분을 터뜨리듯 사실을 폭로한다. 

"「괜찮니? 기분이 안 좋은 거니?」 「엄마, 처음에 돌아왔을 때 말씀드렸어야 하는 게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해야겠어요. 집에 오기 전에 저 브루클린에서 결혼 했어요. 저 결혼했다고요. 돌아오자마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수건을 집어 손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반듯하게 수건을 접어 놓고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왔다. 「미국인이니?」 「네, 엄마. 브루클린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고 마치 기댈 것이 필요한 사람처럼 손을 내밀어 탁자를 잡았다.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리, 결혼했다면 남편이랑 같이 왔어야지.」 「알아요.」 아일리시는 울기 시작했고 머리를 숙여 팔로 괴었다."

엄마는 더 깊게 묻지 않고 '좋은 사람이겠지. 돌아가면 어떤 사람인지 편지를 써다오' 하고 말한다. 그러곤 피곤해서 다시 이야기 하지 못할테니,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자고 하며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머니가 이 대목에서 드디어 '애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하고 자신의 무심함을 깨달았길 바란다. 내일 아침이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날 아일리시는 이제 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아일리시는 선술집에 가서 짐을 만나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려는 자기 모습을, 또는 대신 일을 봐줄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시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짐과 함께 밖에 나가서 작별 인사를 전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가 상처 입으리라는 건 상상이 갔지만, 정확히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일리시가 이혼하기를 기다리겠다고 하고 떠나지 말라고 설득해 올지, 아니면 왜 자기를 부추겼느냐고 해명을 요구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꾸러미를 챙기면서 친구들, 짐과 함께 찍은 사진을 찢어버리고 싶어하는 아일리시에게서 복합적 감정이 드리워진다. 아일리시는 여기서도 저기에서도 행복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곧장 드러나는 아일리시의 각오에 공감이 된다. 어쩌면 아일랜드에서의 삶이 '꿈'인지 모른다. 지금은 혼란스러워도 언젠간 웃게 되고 잊을 날이 온다고. 지금은 그저 '현실(브루클린)'로 돌아가야하는 것 뿐이라고. 

"커시갭에 갔던 날 찍었던 사진들, 짐과 조지, 낸시와 같이 찍은 사진과 짐과 단둘이 카메라를 향해 너무도 순진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을 들고 있던 그녀는 한순간 그것들을 찢어 아래층 쓰레기통에 버릴까 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보고는 천천히, 가방 속에서 옷을 죄다 꺼낸 뒤 앞면이 바닥을 향하게 두 장의 사진을 고이 놓고는 그 위를 다시 옷으로 덮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곧 있으면 이상하고 아련한 꿈처럼 여겨지게 될 일을 추억하게 될 날이 오리라."

이런 각오를 다지게 만드는 특수한 상황이 바로 '이향' 살이이다. 나는 사실 작가 보다도 역자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촌철살인으로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이향(離鄕). 누구든 일단 고향을 떠나면 새로운 삶터에서도, 고향에서도 결국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자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이것은 마치 토빈이,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삶은 비슷한 과제를 준다는, 다시 말해 내가 나인 이상 조건과 환경이 달라졌다고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등골 서늘한 사실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기에 반대한다. 이건 등골 서늘한 사실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타향살이 하는 내가 각 구절에 있어서 내 느낀 감정을 서사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이 소설 자체가 갖는 의의는 역자가 아래와 같이 잘 정리 했다. 

"가족, 언니, 암담한 실업 상태, 이민 초기의 타향살이, 까닭 없이 모든 게 서러운 신입 시절, 진짜 사랑인지 의심되는 사랑, 한밤중에 화들짝 깨어나서 절감하는 청춘의 막막함, 고향을 다시 찾은 낯선 느낌, 서서히 고향이 다시 익숙해질 때쯤 그 조화로움 위에서 문득 지질해 보이는 도시의 삶, 애써 치장했지만 결국 초라해지고 마는 위선…. 잊었던 많은 것들을 『브루클린』은 다시 불러냈다. 그렇게 살아난 기억들에 동반된 복잡한 감정 속에서, 미소를 자아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과 유머가 한편으로는 가슴을 말랑하게 만들고 정신을 무장 해제해 버리는 바람에, 어디쯤에 이르러서는 그냥 엎드려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소설은 아일리시가 짐을 싸고 먼동이 트자 집을 떠나는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와 소설이 대치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 점 때문에 소설과 영화를 둘 다 봐야 묘미가 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선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는 아일리시가 '현실로 돌아가자' 라는 다짐을 했을 거라고 위에서 추측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을 유투브에서 찾아서 바로 봤는데, 여기에 대해 극중 아일리시가 대답을 해줬다. 


"And you will realize that this is where your life i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