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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tante Zen

[도서/리뷰]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안나 가발다) - 떠나는 자의 괴로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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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안나 가발다) - 떠나는 자의 괴로움

Zen.dlt 2018. 2. 2. 14:23

 

 

남편 아드리앵은 아내 클로에와 자식을 남겨놓고 내연녀와 비행기를 타고 도피한다. 마음이 병든 클로에의 곁에서 시아버지 피에르가 그녀를 달래지만 클로에는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피에르의 말들을 들을 정도로 추스리지 못한 상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은 물론 삶의 불합리함과 허무함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고 있다. 남편에 대한 믿음을 당연시 했던 결과가 이 불행의 이유라 믿고, 감정에 솔직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피에르가 자신에게도 인생의 진짜 사랑, ‘내연녀’가 있었음을 고백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클로에가 관심을 보인다. 피에르는 아내 쉬잔과 열렬히 사랑을 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떠밀리듯 결혼한 것이었다. 나이 마흔다섯이 돼 만난 서른살의 마틸드라는 여자는 그에게 살아있는 감각을 처음으로 알려준 여자였다. 5년간 밀애가 지속되는 동안 피에르는 두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지쳐갔으나 마틸드를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나도 당신처럼 내가 원할 때만 당신을 찾을 거예요' 라고 슬픈 선택을 해버린 마틸드에게 차라리 안도감을 느낄 정도의 능구렁이였다. 피에르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게 살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두 여자의 인생을 망가뜨렸고 자기 인생조차 망쳤는지 클로에에게 말한다. 피에르는 자신의 비열함을 인정하고 마틸드를 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에 아드리앵에게서 경탄과 아픔을 동시에 느낀다. 아드리앵은 타협이 아니라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피에르는 삶을 엉킨 실타래에 비유한다.

"어떤 실 하나를 잡아당겨야 하는데, 어느 걸 잡아당겨야 할지 모르겠구나.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아 이런, 이거 되게 복잡하군…….”

그는 '누구에게나 잘못을 저질러야 하는 때가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때 선택하는 건 자신이다. 마틸드를 선택하지 않은 건 피에르 자신의 인간성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피에르는 온갖 타협, 수긍을 거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삶에 대해 “얻는 건 비겁자라는 낙오, 아쉬움, 회한 뿐!” 이라고 격앙한다.

남편이 떠나고 남겨진 클로에가 삶에 회한을 느끼는 것을 보며 피에르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 고 말하며 "그래서 매일 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위로한다. 그는 슬픔에 빠진 클로에가 딛고 일어서서 더 찬란한 삶, 누려 마땅한 행복을 느끼길 바란 마음에서 "이 모든게 차라리 잘된 것 같다" 고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한다. 이 고집쟁이 늙은이의 말이 클로에에겐 당신의 아들에 대한 옹호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아버님 말씀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인정이 너무 많으셔서 아드님을 그토록 감싸고도시는 아버님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요."

교차되는 관계 속에 상반되는 결정. 어떻게 해도 결국 실은 엉켜져 있을 뿐이다. 피에르의 말처럼 당길수록 더 엉켜갈 뿐이다. 피에르와 아드리앵의 선택은 달랐으나 그 고통의 정도는 같을 것이고. 아드리앙의 내연녀는 언제든 마틸드 같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계속 무기력하기를 택한다면 마틸드는 '거짓투성이의 귀부인'인 쉬잔과 같아질지 모른다. 피에르의 형이 상사병에 걸려 전쟁터에 나가 죽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은 모든 실타래의 근본에는 사랑이라는 불가항력의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클로에가 묻는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바보같은 짓이에요. 그렇죠? 제대로 되는 법이 없잖아요?"

삶은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 노력은 물거품같지만. 늙은이가 보기에 인생은 '한 번 좌절했다고 포기하기엔' 애틋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것'에 대한 회한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란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마지막에 피에르가 말한 딸과의 일화는 그것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피에르의 어린 딸이 아빠와 빵집에 들어가 함께 빵을 사서 나왔다. 길에서 딸 크리스틴이 빵의 꽁다리 부분을 달라고 하지만 피에르는 식사시간에 주겠다며 거절한다. 그러곤 식사시간, 딸의 접시에 꽁다리를 놔주자 딸은 그것을 동생에게 넘겨 버린다. 아까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딸이 말한다. "아까는 먹고 싶었어요." 피에르는 클로에가 아닌 부엌의 가구들에게 묻는다. "그 고집스런 딸은 좀 더 행복한 아빠랑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클로에가 우울한 상태로 내뱉는 심정과, 담담히 그녀를 위로하며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피에르의 말들이 일종의 '위로의 문구'들로 다가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가 이것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선택이니 뭐니, 불륜의 옹호니 뭐니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문장'들이 가지는 위로의 힘이었는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말들 말이다. 절망의 순간에 붙잡고 싶어지는 그런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