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도서/리뷰] <운명과 분노> - 영혼의 고갈로 인해 메꿀 수 없는 사랑의 틈 본문
<운명과 분노(Fates & Furies)>. 로런 그로프가 2015년에 쓴 장편소설(608p)이다. 이 이야기는 두 남녀의 결혼생활을 그들의 농밀한 관계와, 주변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건들을 조합하여 연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햇살처럼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수수께끼와 음울한 분노는 두 커플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간극을 만들고, 이윽고는 균열을 만들어낸다. 소설의 전반부 '운명'은 남편 로토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후반부 '분노'는 아내 마틸드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부유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로토의 방황하는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고독감 탓에 문란하면서도 순수하여 위태로운 청년기를 보낸 로토. 그렇게 자란 로토는 부서질 것 처럼 순수한 영혼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악(Evil)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른이 된다. 그런 로토는 대학 졸업할 때쯤 광란의 파티에서 만난 마틸드에게 반해 몇 주 안에 결혼을 하고 만다. 로토에게 마틸드는 성녀였고,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은 없는 것 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로토가 46세에 죽고, 이제 혼자 남은 마틸드가 삶을 돌아본다. 어쩌면 로토는 마틸드가 살아온 과거의 무게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를 멋대로 '성녀'로 만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랑 받지 못하고, 터뜨리지 못할 분노를 키우고 자라 온 마틸드. 마틸드에게 로토는 자신의 억제된 분노와 우울을 투영시킬 수 없는 존재였다. 마틸다는 로토를 끌어안고 있을 때 떠오르는 무표정도 로토에겐 들킬 수 없는 것이었다. 마틸드는 자신이 원하는 길로 로토를 걸어가게 하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오롯이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천재성을 드러낸 로토의 성공과 열정은 그녀에게 비참함을 안겼다. 마틸드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을 자학하듯 지켜보며 자신의 하찮음을 느낀다. 그리고 로토는 죽는 순간에도 마틸드를 비참하게 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죽음은 로토가 마틸드에게 어떠한 '마지막 메세지'도 전하지 못하게 했다! 혼자 남은 마틸드는 "이제 어떻게 하지" 하는 끝없는 물음을 던지고 그녀의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 분노는 자기파괴적이어서 그녀로 하여금 엉뚱한 사람에게서 애정을 원하게 하거나 혹은 친하게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배신하고 복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전반부 '운명'이 시간 순서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후반부 '분노'에서는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마치 혼자 남은 마틸드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결혼생할까지 다양한 부분들이 잘린 필름 처럼 뒤섞여 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마틸드의 과거(매춘), 마틸드가 로토에겐 숨겨왔던 고부갈등, 로토의 단짝 친구 콜리가 캐낸 마틸드의 매춘 과거, 그리고 마틸드가 없는 장소에서 그 비밀이 로토에게 폭로되었다는 사실, 의도적으로 마틸드가 불임수술을 했던 것들 까지. 이런 것들은 로토의 시선에선 가려져 있던 것들이었지만 서서히 둘의 결혼 생활에 침투해왔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했다. 마틸드의 분노는 콜리를 향한다. 그를 정상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마틸드의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복수를 위한 자료를 불태워 버리는 장면에서 그녀의 분노가 갈 길을 잃고 만다. 마틸드가 특유의 우울감 때문에 로토에게 주지 못했던 것, '아기'. 바로 그것이 인생이란 막에 갑자기 존재를 드러낸 것이었다.
로토가 찬란하게 마틸드를 묘사하고 성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 애정을 쏟는 전반부와, 냉소적이 된 마틸드가 보이는 후반부의 대치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들은 끔찍하게도 사랑하여서 가난한 삶도 이겨내왔지만, 사실은 언제나 고독했는지 모른다. 상대방을 '온전히 알고 전부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걸까. 마틸드가 간직하고 있던 퇴폐한 과거를 로토가 알았다면 그들에게는 어떠한 '간극'도 없는 결혼생활이 가능했었을까. 인생의 순간 순간 다른 선택들을 내렸다면 사람들은 다른 인생의 길을 걸었을테지.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마틸드는 육십세가 넘어 죽는 마지막 순간에 로토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해변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청혼했던 순간을 추억한다. 그러곤 단 한가지 후회를 느낀다. 로토가 무모하게도 파티에서 그녀에게 청혼했던 날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다. 로토는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그녀가 '기꺼이'라고 말했다고 믿고 살았다. 마틸드는 마지막으로 소망했다. 그 때 자신이 '기꺼이'라고 말했었기를. 로토에게 그녀가 선한 마틸드로 기억되었기를. 우리는 살면서 "그 때 그렇게 했었다면" 하고 자문하지 않는가. 그리고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선 그저 추억하고 희망한다. "그래도 좋았지" 하고. 역자는 사랑만이 다가 아닌 마틸드였다고 말하지만. 마지막에 난 로토를 향한 그리운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는 '관점의 문제'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만 보면 인생은 단조롭다. 시선을 돌리고, 다른 맥락을 돌아보면 Comedy도 Tragedy고 Tragedy도 Comedy다. 마틸드가 복수를 포기한 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이 부부의 삶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은 단순하지만 <운명과 분노>는 그 어떤 인생보다 처절하고 습하고 답답하지만 불꽃 같은... 소중하고 찬란했던 인생의 순간순간을 농축하여 보여준다. 우리네 평범한 인생에 얼마나 불꽃이 약하게 붙어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기면서.
“안경을 쓴데다 운동복 차림에 머리도 감지 않은 아내는 얼마나 추레해 보이는가. 결혼하자고 매달리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몇 주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고 어디 먼 곳에 가있는 듯 했다.”
“두려움이 커졌다. 그녀가 그를 떠나려는 거면 어쩌지? 이 어둠의 기간이 그녀 때문이 아니라 그 때문이면 어쩌지? 그는 자신이 그녀를 실망시켰음을 알았다. 그녀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어쩌지? 그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지만 그건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로토는 결혼생활을 시작할테고, 보수는 좋지만 시시한 일을 하는 직장에 다닐 테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카드, 비치하우스, 중년의 군살, 손주, 넘치는 돈, 권태, 죽음이 이어진다. 샐리는 마틸드가 로토를 그만의 나태함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해가 지나 이곳에 함께 모인 지금도 그는 여전히 평범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생각했다. 그는 술에 취했고, 외로웠고, 좌절감에 속을 끓였다. 애초에 성공은 보장되어 있었다. 어쩌다보니 그의 잠재력을 중요하지 않은 일에 허비하며 살았다. 이건 죄였다. 서른 살인데 아직 이룬 것이 없었다.”
“그들이 결혼한 지 십칠 년째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속 가장 깊숙한 방에서 살았다.”
“로토가 아내를 잊을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한결같고 변하지 않는 차원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의 리듬은 그의 뼈에 새겨져 있었다.”
“비몽사몽간의 그녀는 불지옥 같은 악몽을 꾸었고, 꿈속에서 로토는 더 이상 그녀가 필요없다며 그녀를 떠나겠다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 외로웠고, 외로움에 목이 멨다.”
“두 사람이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때, 마틸드의 남편이자 유명 극작가인 랜슬럿 새터화이트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몸에서 분리되어, 벗은 자기 몸을 아주 멀리에서 바라보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틸드는 마흔여섯살이었다. 사랑을 영원히 끝내기에는 너무 젊었다. 지금도 전성기였다. 예뻐 보였다. 그러나 지금 짝이 없었고, 영원히 그럴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어쩌지’라는 거대한 물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삶의 합은 그 사랑의 합보다 훨씬 더 컸음을 그녀는 깨닫는다.”
“마틸드는 반짝반짝 되살아났던 남편이 다시 위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서서히 일어나는 조직의 괴사, 끊임없이 조금씩 흐르는 피처럼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거트루그가 죽은 뒤 앨리스가 한 말이다.”
“마틸드의 뇌에 인 마지막 불꽃은 그녀를 바다로, 거친 해변으로 데려간다. 저 아래 해안선에 한밤의 횃불처럼 불타오르는 사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념일이나 파티, 연극이 초연되는 밤, 다른 행사가 아니라 , 이런 말없는 친밀함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루었다. 어쨌거나 그 부분은 끝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며 육신은 서서히 뒤틀리다가 한 번의 거대한 경련을 맞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정한 마틸드, 선한 마틸드였기를 바랐다. 그가 믿었던 마틸드였기를.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기를. ‘결혼해줘’ 그녀는 웃었을 것이고,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말했을 것이다. ‘기꺼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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