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Dilettante Zen

[소설/리뷰]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본문

Library

[소설/리뷰]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Zen.dlt 2017. 6. 17. 01:06

 

 

고전 소설 E-book 목록을 뒤지다가 이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책이 '쌍둥이'의 아이덴티티를 소재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5년에 걸쳐 3부작으로 완성한 이 소설은, 원래는 연작으로 낼 계획이 없이 시작되었으며, 한국에서 번역될 때 한 권으로 묶여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  알파벳 순서만 바꿔 이름을 지어 더더욱 동일하게 느껴지는 쌍둥이 형제. 1부는 이 쌍둥이 형제가 전쟁 탓에 할머니 집에 맡겨진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통해 고난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자 한다. 겨우 여덟살 남짓의 소년들이 보여주는 잔인한 면모는 전쟁을 떠나서, 인간 자체의 어두운 본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야기 속에서 주어는 철저하게 '우리'라고 표현되어 존재의 독립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감정 표현은 지극히 절제되고 보여지는 현상만 서술되고 있는 점이 더더욱 흡입력 있게 책을 읽히게 만든다.

2부에서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하고, 남겨진 루카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어는 '우리'에서 '그'가 된다. 루카스는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인생을 일구어 나가는데, 그 안에서 '쌍둥이 형제' 부재가 그에게 큰 상심과 고독을 안겨 준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영혼없이 살던 루카스는 한 모자를 거두어 돌보게 되는데. 곱추로 태어난 마티아스를 아들처럼 아껴주었지만, 마티아스가 자살을 하자 루카스는 헤어나올 수 없는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이야기 끝에서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가 찾아와 루카스를 찾지만 루카스는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1부가 쌍둥이 형제의 일상에 좀 더 밀착해 있었다면, 2부에서는 주변 인물들의 고단한 삶에 조명함으로써 주제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부에서는 이야기가 모두 뒤집어지며 소설의 제목이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인 윤곽이 드러난다. 사실 형제는 전쟁 탓에 부모와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는 어머니가 쏜 총알에 잘못 맞아 재활원에 들어갔다가 전쟁 탓에 다른 도시로 흘러나가게 된 것이고. 클라우스는 엄마를 미치게 만든 원흉인 아버지의 내연녀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그러곤 이복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어 고민하고, 미치광이가 된 어머니를 홀로 돌보게 된다. 그렇게 거의 오십세 가량이 된 형제. 클라우스는 막상 루카스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더욱 미쳐버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루카스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책이 왜 철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론, 결여된 삶에서 오는 고독감. 이런 것들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해보게 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아고타는 철학적 사유를 제공하였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철학가들의 몫인 것이다.

왜 형제가 서로를 찾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인가? 3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1부와 2부의 이야기는 루카스가 만들어낸 소설이다. 또 1부에서 국경을 넘은 것은 클라우스로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재활원 생활을 통해 다른 도시로 피난가게 된 것은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새로운 도시에서 세가지 거짓말을 한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엳럽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이 세가지 거짓말은 계속해서 소용돌이 치는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표면화 한다. 그것은 외부적 요인 또는 자발적인 의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반전되고 정신과 삶의 모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 모양이다. 평론가들은 질문을 던진다. 왜 아고타는 1부와 2부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이야기를 반전시켰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한 것인가? '끊임없는 요동치는 아이덴티티의 불확실성'.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이 평론가들의 답이다. 그런 확연한 목적이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아고타의 능력은 감탄스러운 것이었다. 전쟁, 헝가리 반혁명 운동, 친오빠에 대한 동경의 마음 등, 쓰고 싶은 소재를 마음껏 쓰면서 무거운 주제의식을 표면화한 것으로 인해 이 책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