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리뷰] 염마이야기(나카무라 후미) - 불로불사의 남자가 살아가는 이야기 본문
젊음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 지식을 쌓고,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탐닉할 수 있는 그런 영겁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 영겁의 삶 속에서 짊어져야 할 괴로운 고통이란 건 어떤 것일까. 그걸 상상해볼 수 있는 소설이 『염마이야기』이다.
이치노세 아마네는 신센구미에 잠입한 밀정 사무라이였는데, 우연히 부상을 입은 그를 문신사인 호쇼가 데려다 고쳐 주고 손바닥에 염마란 글씨를 새긴 것이 계기가 되어 불사의 몸이 되고 만다. 호쇼 노인은 죽기 전에 불로불사의 염마 신귀를 새기고 싶은 강한 욕구를 실현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호쇼의 문신은 신귀를 몸에 새기는 것으로, 숙주는 신귀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가게 된다. 이치노세가 호쇼에 의해 불로불사가 되는 대목은 그 유명한 판타지 소설 『트와일라잇』에서 주인공 뱀파이어가 불사의 몸이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제 불사의 몸이 되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된 이치노세, 즉 염마는 호쇼가 과거에 파문한 '야차'라는 문신사를 찾아 죽이기 위한 사명을 갖고 살아간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이곳저곳 떠돌며 문신사로 활동하는 염마에게도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신센구미 자객 시절에 자신이 배신하고 말았던 오카자키의 딸인 나쓰. 그리고 염마가 술독을 멀리하게 되는 신귀를 새겨 준 무타 노부마사. 호쇼가 키우던 불사의 요괴 고양이. 노부마사는 염마의 비밀을 눈치채고 그를 조용히 후원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나, 염마는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느라 늘 비뚤어진 태도를 보이곤 한다. 여성이 된 나쓰와 연애 감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시계가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 때문에 둘은 솔직해지지 못하고 '가족'의 형태로서 곁에 있고자 한다.
상처가 나도 순식간에 재생되는 능력을 가진 신비한 염마. 끔찍한 잔혹 동화 같은 분위기에 제대로 박차를 가하는 것이 살인사건의 역할이다. 염마가 쫓는 야차는 여자의 심장을 도려내는 욕구를 행하는 신귀를 새긴 자다. 염마의 누나 사와도 어린 시절 그 야차에게 살해 당한 것이다. 염마가 머무르던 요코하마에서 매춘부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염마는 그 배후에 있는 자가 야차라는 걸 운명적으로 느낀다. 드디어 염마와 야차가 만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엔 나쓰가 있었고, 염마는 나쓰를 구하기 위해 야차 사냥을 중단해야 했다. 그야말로 연극 같이 극적인 플롯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인가 염마와 야차는 마주할 일이 있었다. 야차는 악귀가 된 것을 후회하며, 염마에게 죽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 염마는 그런 야차를 순순히 죽여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100년의 시간이 흘러 1940년. 염마는 일본의 전시 상황을 보며 의리 있는 사무라이들의 시대가 더 나았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이제 염마는 불로불사의 몸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괴물 고양이의 자연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나쓰도 무타도 이제 노인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가려 한다. 혼자 남는 것의 두려움을 실감하게 된 염마가 전쟁 폐허 속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에게 '불사의 신귀'를 새겨준 것에서 그의 외로움이 절절히 드러난다. 나가사키 폭격 소식을 듣고 염마는 청년의 생사가 걱정되어 나가사키까지 떠난다. 거기서 문신이라는 숙명으로 얽힌 평생의 숙적 야차까지 만난다. 야차와 마지막으로 칼부림을 하고도, 서로를 죽이지 못했는데. 염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쓰는 염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쓸쓸히 죽으려는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염마는 마지막까지 솔직해지지 못했던 자신의 대답을 전하기 위해 나쓰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나카무리 후미는 염마와 야차,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불로불사의 삶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애잔함과 비통함을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사랑, 분노, 체념, 안타까움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연약한 염마를 통해서 새어 나온다. 스무살 아름다운 미청년의 모습을 간직한채로 100살의 노인의 가진 그윽한 지성을 드러내는 염마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어지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전해주는 시각적인 매력은 상당하다. 신귀를 새길 때는 이매망량이 등장하는가 하면. 외국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메이지 시기의 요코하마 풍경에 대한 묘사도 매우 활기차다. 그 덕분에 전쟁폐허와 환자가 넘치는 병원이 주는 차가운 인상이 더욱 강렬하게 전달되어 오는 것만 같다. 핵폭탄이 떨어져 부상을 입자 야차의 몸도 완벽한 재생을 이루지는 못했다. "신귀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이야." 이제껏 사람을 수없이 죽인 야차의 말이다. 불로불사의 몸을 얻은 한 사람의 인생에 조명하고 있던 이야기가, 갑자기 더 큰 무언가가 되는 기분이 드는 대목이었다. 다 읽고나자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이 잔잔히 깔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길었던 이야기의 분량과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는 것들이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이런 무거운 엔딩을 돕기 위한 것이었는가 하고 반대로 생각해본다.
염마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나쓰를 찾아가기로 맘 먹은 순간,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다. 제목이 참 그럴싸하다. 『이야기』.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책쟁이는 설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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