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도서/리뷰]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 집단자살 취재 논픽션 본문
《크리피》로 국내에 소개된 마에카와 유타카 작가의 이전 작품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을 읽었다. 1985년 한 남자와 여섯 여자가 가고시마 시의 한 동굴 안에서 집단자살을 한 사건의 내막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한 기자가 취재하여 논픽션으로 쓴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숙부가 사건의 관계자였던 것 때문에 흥미가 생겨 사건을 조사하게 됐다는 경위를 밝히고. 1-5장에 걸쳐 자살의 중심에 있는 실질적 주인공 '기우라 겐조'와 그가 벌인 일들이 소개된다. 에필로그에서는 사건 취재 종료 후 마지막 관계자를 만나서 더욱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전직 대학 교수였던 기우라는 조직폭력단 조장의 딸과 이력적인 결혼을 하지만 그녀를 목졸라 죽인 후 교도소에 수감된다. 출소 후 경제학 지식과 부모의 여관경영업을 이어 도쿄에서 매춘알선업을 시작한다. 기우라는 하기노야라는 여관을 목표로 삼고 하기노야 사장에게 이자 대출을 해준다. 여기엔 기우라가 알고 있는 야쿠자가 관여하고 있어 기우라의 권력은 상당했고, 그는 서서히 여관경영권을 장악해 나간다. 하기노야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당시 당사자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주인공이 픽션적 요소를 적절히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덕분에 분량이 상당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모든 관계자들의 당시 심경에 대해서는 많은 조사를 통해 짐작을 해나가는 것과 달리, 기우라에 대해서는 "했을까", "무엇이었을까" 하며 거의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우라. 그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이다. 몬스터. 악마. 사이코패스. 그 모든 기질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 그의 그런 성격의 기원, 행동의 발로. 이런 것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이 책을 덮을 때까지 독자가 가지게 될 의문이다.
책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참고인물이 있다. 우타. 바로 기우라가 출소 후 부모님의 여관에서 데리고 도쿄로 함께 올라 온 소녀이다. 소녀는 하기노야 여관 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녀야말로 30년이 지난 지금 사건에 대해 취재 요청을 해볼 수 있는 참조인이 된다. 기우라와 여섯 여자의 집단 자살 사건 이후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가 그녀였던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우타를 찾아간다.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범죄실록의 느낌이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본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든다. 기우라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상당하다. 지적이고 반듯한 외모, 조용한 성격. 그러나 섬뜩한 명령을 서스럼없이 내리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하며.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어 악한 일에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매료 시켜 버린다. 이런 인물상에 대한 큰 고찰은 책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우라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남아있는 증거라곤 저런 표면적 특성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상상력' 만을 남기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기우라의 행동의 이유에 대한 정답은 그저 독자에게 열려있는 것과 같다. 어쩌면 '왜'라는 물음은 '우문'인지도 모른다. 마에카와 작가의 《크리피》에서도 '왜'를 물을 필요조차 없는 '사이코패스' 이웃친척이 등장해 간담을 서늘하게 했더랬다.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은 《크리피》에 비하면 인간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도를 한 것 같다. 작가의 다음 도전으로는 인간의 폭력성을 이끌어내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파헤치는 것 쯤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
《크리피》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느끼는 점은, 마에카와 작가가 빈틈이 없다는 점이다. 간혹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보면 어설픈 구조와 억지스러운 이론을 강요 받는 듯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나에게는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가 그런 소설이었다.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은 분위기의 조성, 사건의 흐름, 편집 구도 등 모든 게 정결하면서 어긋남이 없었다. 오랜만에 트릭 중심의 추리소설에서 벗어나 마음이 먹먹해지는 효과를 주는 휴머니즘 미스터리 소설을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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