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lettante Zen
[소설/서평]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걸작선 - 한 방울 음침함을 첨가하지 본문
러브 크래프트를 간신히 알거니와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동료라고 할 수 있는 클라크 애슈턴의 걸작선을 구입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클라크의 걸작선이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들보다 가독성이 좋다는 어느 독자의 평. 그리고 어쨌든 이 책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클라크 걸작선이라 기념이 될 거라는 점.
책은 아베르와뉴 연작, 하이퍼보리아 연작, 조티크 연작, 포세이도스/지카프/화성 연작, SF & 호러 작품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조티크 연작 일부까지만 읽고 중간을 뭉텅 뛰어넘어 SF & 호러로 넘어간 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 때문이었다.
마법사나 고대신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아베르와뉴 연작이나 하이퍼보리아 연작도 지루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허무맹랑함에도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게 그건 '설명되지 않는 호러'다. 어떤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상황이 구사된다고 해도 그 배경에 '흑마법'이 있다면 호러와 미스터리는 다 설명되어 버리고 만다. 덕분에 무섭지도 않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아베르와뉴 연작의 일부 작품, 특히나 <일로르뉴의 거인>에서는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은 '흑마법'이 행하는 위대한 주술을 묘사하는 데 가려져 도드라지지 않았다. 명작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느낀 지루한 감정보다도 더 지루한 감정이 느껴졌는데. 그래도 읽는 와중에 이로운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노곤한 상태에서 스르르 잠에 빠질 수 있었다는 점이랄까. 그리고 분명 이 휴식은 애디슨이 안락의자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아이디어를 끄집어 냈던 것 처럼, 내게 도움이 되었어야만 했는데.
러브 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괴상한 형상을 한 고대신들이 있는 세계를 상상해내고 방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는 건 그냥 감탄하고 넘어갈 일일 뿐이었다.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한 많은 판타지 소설들에서 보기 힘든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마법 이야기와 버무린 것도 의미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많은 작품들이 겨우 몇 년 사이에 정력적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재였거나 고독한 열망가였거나. 혹은 둘 다.
SF & 호러 연작 부분에 가서 보다 더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불길이 이는 마법의 성이나 지상낙원 같으면서도 신비로운 마법 세계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게 아니라 다소 평범한 일상 생활 속의 기이함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마멉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화자의 입장에서 보면 앞 이야기들과 달리 '숭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긴가민가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호러'라는 장르만 보고 클라크의 걸작선에서 기대했던 것이 너무 한정적이고 뻔한 현대식의 이야기에 지나치지 않았던 게 문제인 것 같다. 반대로 얘기하면 《클라크 애슈턴 걸작선》은 기대했던 것 보다 더 풍부하고 다양한 맥락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여타 영상매체나 소설 작품들이 없었다면 《클라크 애슈턴 걸작선》을 읽는 동안 재미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땅을 여행하는 젊은이들을 덮친 식인 식물이 등장하는 영화 《The Ruins》 는 <지하 무덤에서 나온 씨앗>을 읽는 데에 실감나는 상상력을 더해줬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흑백 이미지는 <일로르뉴의 거인>의 음산한 배경을 상상하게 하고. 《나니아 연대기》나 《겨울왕국》의 빙하는 <빙마>의 장면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줬다. <마법사의 귀환>은 영화 《도플갱어》나 아야츠지 유키토의 《재생》에 영감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지하 무덤에서 나온 씨앗>이 보여주는 플롯의 형태는 이토 준지의 《혈옥수》와도 비슷한데. 그쯤 생각했을 때 《클라크 애슈턴 걸작선》을 읽으면서 느낀 그 특유의 종결법을 인식하게 됐다.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비극은 모든 것의 종말로 끝이 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해가 떠오르는 식의 결말. 알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어디에서나 언제서나 진행되고는, 우리에게 인식되지도 못하게 없어지고 만다는 가능성의 제시라고 (멋대로 해석)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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