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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tante Zen

[소설/리뷰]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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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Zen.dlt 2017. 4. 15. 01:37

사유가 녹아 든 소설 형태의 글. 지극히 내 스타일의 문장이었다. 복잡하고 현란하면서도 사실은 무미건조한 문장의 연속이지만 밑줄 치며 읽게 된다. 


우린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들이 더 끌린다"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앨리스와 에릭 커플의 연애 양상을 보면 '정반대' 보다 더 복잡한 성격 유형의 특징을 보게 된다. 앨리스와 에릭의 취향 또는 성격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연애 지침서' 에서 볼 법한 것들 보다는 훨씬 디테일하다. (여기서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 방식'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저 그것들이 맞물리지 않고 충돌하다가 튕겨져 나가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라는 점 뿐이다. 보통은 연애가 잘 굴러가지 않고 끝을 맞이했을 때 무언가 '문제점'을 찾게 되는데 말이다. 앨리스는 마지막 장에서 에릭에게 그 동안의 수많은 경고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을 방치한 것이 문제였다고 하며 종지부를 찍지만, 전적으로 에릭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소설이 주고자 하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에릭과 데이트를 시작할 때는 "왜 안되겠어!" 하고 될대로 되란 식으로 돌진하던 앨리스가 에릭과 헤어진 후 보여주는 모습은 상당히 상반된다. 자신에게 좀 더 진중하고 젠틀하면서도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필립에게 앨리스가 솔직해지지 못하는 건 에릭과 헤어진 충격도 있겠지만, 에릭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접근방식에 있어서 당황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무엇이 의도이건 간에, 앨리스의 애매한 태도 속에서 느껴지는 건 또 상당히 다양한 사유가 나올 수 있는 연애가 앞으로 전개될 거라는 점이다. 제목이 묻고 있듯이. "우리가 사랑일까." 계속되는 의문을 남기면서. 그렇다면 연애 초반에 애리스와 에릭이 느끼던 불같은 감정이 반복되는 충돌과 희생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안정적인 연애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 것인가 하고 유치한 감상을 얻게 되고 말았다만.

 

글의 형태 자체는 내 취향이었지만,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고 그냥 그랬다고 하는 게 맞겠다.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연애나 사랑이 아닌 것과 관련된 사유는 전부 스킵해야했으니까. 좀 더 멋지고 좀 더 철학적이고 좀 덜 감정적인 (그러면서도 학자로서의 사유가 가득 한) 사랑 이야기를 읽었다는 점이 기념비적이다.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누군가 그녀의 작은 부분들을 제대로 봐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누군가 "당신이 ...... 하면 정말 좋아"하고 말해주면 외로움이 사라지고 그녀도 같은 반응을 보이련만. (p 14)


마침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을 만났다. 이제 파티에서 우울하게 어슬렁거리고 TV앞에서 저녁을 보낼 일이 없어졌다. 둘의 관계에는 과거의 연애에 뒤따랐던 불안감 따위는 없고, 그녀가 찬미하던 상식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p 43)


그녀는 이유를 분석할 수 없었지만. 에릭의 집 어두운 부엌에 앉아 있노라니 불현듯 극적으로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몇 분 전만 해도 어른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모든 게 급속도로 해체되어 자책감과 혐오만 남았다.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p 43)


자신의 강한 욕망과 빠른 진도에 스스로도 놀랐다. 한구석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착한 여자는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배워온 인습적인 도덕관념의 잔재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다. (p 51) 


하지만 에릭이 암시하는 시간의 틀은 극도로 짧아서, 일주일을 넘어가지 않았다. 앨리스는 미래가 더 분명히 보이기를 바랐지만, 그 남자는 연대기적으로 장래에 관계되는 위험스런 일은 쏙쏙 빠져나갔다. (p 55) 


그 남자는 돈에 관한 한 인심이 후했다-반지는 결코 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처신은 감정적으로 너그럽지 않았다. 그것은 앨리스의 5파운드짜리 치즈에 대한 빚을 갚으려는 인색한 시도였다. 에릭이 더 큰 선물을 주려는 것은 선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사하는 위치에 서면 자율성을 잃고 간섭 받게 되는 것을 싫어해서이기도 했다. (p.103)